“내 확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행과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얼마간, 그것도 적지않은 즐거움을 느낀다.” ― 에드먼드 버크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에서)

1.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인가?

요즘들어 자주 연예인들의 아픈 과거나 고통스런 가족사를 듣게 됩니다. 암에 걸린 아내,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 교통사고 등등... 화려하고 멋져 보이는 그들에게 말 못할 아픔이 있다는 사실에 팬들은 같이 눈물 흘립니다. 고통과의 힘든 싸움을 이겨내거나 현재 극복해가고 있는 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격려를 보냅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아픈 가족사나 질병 등은 연예인들에게는 드러내서는 안 되는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왜 마치 릴레이경기라도 하듯 그들은 금기를 깨뜨리는 걸까요? 금기시되던 어떤 것이 드러날 때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 이유로 연예인들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 놓고 팬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는 팬들 입장에서는 연예인들의 깊숙한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관음증이 발한 거고, 연예인 입장에서는 팬들의 그런 욕망을 적절히 대응한 것이겠군요.

사실 스타들이 온갖 고통을 극복하며 오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오래된 스토리입니다. 〈스타탄생〉같은 영화는 몇 번이나 리메이크 되었을만큼 진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초점은 연예인 스타에게 가는 게 아니라 팬들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비밀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요?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표지. 이 책을 통해 수전 손택은 고통스런 이미지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의 병폐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긴다면 그들은 더 이상 남의 고통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헬레니즘시대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가 간파하였듯이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타들이 고백하는 비밀스런 고통은 팬들에겐 고통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은 나에겐 쾌락입니다.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고, 타인의 고통지수는 내 행복지수와 비례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보며 저으기 내 삶의 만족도를 잽니다. 오늘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질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테러로 죽습니다. 이렇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보며, ‘어쩜 저럴수가!’ 하다가도 곧이어 나오는 라면광고에 불현듯 라면이 먹고 싶어집니다. 타인의 불행이 너무 자주 반복되다 보니 무감각해진 것일까요? 분명 그런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든 타인이 불행할수록 나의 행복지수가 상승하고 타인이 행복해 보일수록 나의 고통지수는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나요? 최고의 복수는 행복해지는 거라고.

자본주의는 이런 함수관계를 적절히 응용하여 상품을 만들고 팔아왔습니다. 멋진 옷과 명품 핸드백, 넓은 아파트에 고급 승용차는 행복의 정도를 표시하는 기호입니다. 이런 것들을 소유한다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통까지 더해져서 행복감을 높이고,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행복감을 곱해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에 우월감과 열등감이 더해지면 그 쾌락과 고통의 상관지수는 무한히 확대됩니다. 그리하여 빚을 내서라도 소유하는 행복을 느끼려하고, 자본주의는 이런 욕망에 불을 지핍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은 매우 비싼 상품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기꺼이 지불해가며 타인의 고통을 삽니다. 연예인들의 비밀스런 불행은 매우 비싼 상품입니다.

여기 타인의 고통 그대로를 자신의 고통으로 품은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겐 아무런 고통도 번뇌도 없을 성싶습니다. 그러던 그가 동남서북의 문으로 나가서 각각 생로병사의 고통을 목격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심각한 고뇌에 빠집니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곧장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현대인들 같으면 자신의 행복감이 배가했을 터인데 말이지요. 부처님 마음이란 이런 거겠지요. 그저 겉으로만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로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품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부처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그는 카필라 왕국의 고타마 싯달타 태자였습니다.

2. 인간은 왜 종교에 귀의하는가?

불교에서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고통에서 헤매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지은 업(業)이 쌓여[집(集)] 고통[고(苦)]을 겪습니다. 따라서 이런 고통을 사라지게[멸(滅)] 하는 것, 바로 해탈이 바로 불교인들의 목적입니다. 팔정도(八正道)는 해탈에 이르는 방법[도(道)]인 것이지요.

삶이 고통이라는 자각은 불교의 원초적 의식입니다. 이때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괴로움에 봉착하고 이 때 던지는 삶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은 곧 불교적 실존인식으로 이해됩니다.

▲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이 포스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 빨간 알약을 먹고 맛대가리 없는 죽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설혹 본인 스스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담과 이브가 지은 원죄의 구렁텅이 속에 인간은 태어납니다. 원죄설이 옳으냐 그르냐는 차치하고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매일 죄를 짓습니다.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는 순간 드는 음탕한 생각도 죄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을 사랑했던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그토록 갈구하는 것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가슴 졸여야 하는 어려운 길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죄를 짓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만이라는 범죄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라는 의미에서의 원죄의식이야말로 기독교가 말하는 실존적 인간상입니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전제되어야 하느님에 의한 구원과 은총이 가능합니다.

반면 유교는 불안 속에 사는 인간을 말합니다. 유교에서 인간은 늘 실수하고, 잘못하고,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과오를 저지르고 나서야 고칠 줄 알고, 고뇌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며칠씩이나 보내고 나야 분발할 줄 압니다. 그러기에 맹자는 “우환 속에서 살고 안락함 속에서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근심 걱정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 이 우환의식이야말로 유교적 인간상을 그려내는 원초적인 의식입니다. 유교는 그런 위에 ‘락(樂)’의 경지를 말합니다. 흔히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는 그런 즐거움의 경지이지요.

지은 죄가 통렬히 다가올수록 신을 향한 구원의 손짓은 더 애절하고, 삶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수록 해탈에의 욕망은 강렬한 법입니다. 근심 걱정으로 며칠 밤을 꼬박 새어 보지도 않고 한 덩어리 밥과 한 표주박의 물만 있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는 단표(簞瓢)의 즐거움을 말하는 건 위선입니다.

이렇듯 종교는 먼저 적어도 의식이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한번쯤은 겪게 되는 실존적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실존적 상황이 절실하여야만 그 종교나 사상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는 물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각각 종교나 사상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역사와 사고방식의 차이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형태의 실존상이 그려진다고 하더라도 그 양태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하나의 거대한 심연을 만나게 됩니다. 살면서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것, 그것이 고업(苦業)의식이든, 원죄의식이든, 우환의식이든, 그 의식의 밑바탕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은 바로 불안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탁월한 분석대로 이 불안은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존재합니다만 불안은 왜,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안이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불안이야말로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이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어 반드시 죽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노병사의 그림자는 곳곳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태자 싯달타가 아버지 정반왕에게 젊음을 유지한 채 영원히 죽지 않게 해 줄 것을 출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요구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사실, 즉 우리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해탈에의 열망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이런 열망이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보편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태자 싯달타는 온갖 산해진미와 미녀들 속에 파묻혀 사는 삶은 인간 실존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다만 일시적인 망각이며 의식의 마비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명품핸드백과 고급 자동차에 눈을 뺏기며 이런 망각과 마비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더구나 이러한 본질망각과 의식마비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살도록 조작하는 자본주의 매트릭스 때문에 더 심화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는 것처럼 기꺼이, 아니 조금은 주저하면서라도 떠나야 합니다. 한 번 시작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더라도, 맛대가리 없는 죽 한 그릇으로 잘 차려진 만찬을 대신하더라도, 우리는 진실의 세계를 찾아 떠나야합니다. 2600여년전 인도 카필라 왕국의 태자 고타마 싯달타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 누리는 약간의 달콤함을 버리고 고행길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 김문갑 / 철학박사 · 충남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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