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에 대한 여러 형태의 논의들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아라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 또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초기경전에 나타난 아라한은 이상적 수행자라고 하는 긍정적인 측면의 기술뿐이지, 아라한의 부정적 측면이나 그 가능성을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가 진행되면서 아라한은 어느덧 비판의 주된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승불교는 소승의 성자라 하여 아라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비판의 내용은 다르지만 상좌부 계통의 문헌인 『밀린다팡하』와 『법집론』에서도 아라한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보인다.
특히 『밀린다팡하』의 경우 전호에서 보았듯이, 재가아라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정도로 상좌부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는 문헌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라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또한 보여주고 있다. 『밀린다팡하』는 잘 알려져 있듯이 어떤 한 특정의 시기에 제작된 문헌이 아니라, 오랜 시기에 걸쳐 개정 증보된 문헌이다. 따라서 이 문헌에 아라한에 대한 모순적 시각이 드러나 있음을 이상히 여겨 필요는 없을 것이다.
I. B. Honer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밀린다팡하』에서는 아라한의 실수와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으며, 홀로 숲에서 고독한 삶을 살면서 수행에 정진하는 뭇 수행자와 재가자의 모범이 아닌, 재가자와 더불어 즐거움을 찾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부파불교시대에 아라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대천(大天, Mah?deva)이라고 하는 스님이 주장한 5사(五事)일 것이다. 대천의 5사를 기록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은 상좌부의 『논사』와 설일체유부의 『대비바사론』이 있다. 이 두 문헌은 모두 대천의 5사를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논사』를 주석한 붓다고사에 따르면, 대천의 5사를 인정한 학파는 동산파와 서산파와 같은 부파라고 한다. 그럼, 대천이 주장한 5사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1) 아라한들 중에는 천마에게 유혹당하여 부정을 흘리는 자가 있다.
(2)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이를 모르는 자가 있다.
(3) 아라한들 중에는 자신이 해탈하고 있어도 여전히 의문이나 의혹이 있는 자가 있다.
(4) 아라한들 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만 깨닫는 자가 있다.
(5) 아라한들 중에는 ‘도(道) 및 도지(道支)는 ‘고이다’라는 말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자가 있다.

이상이 대천이 아라한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다섯 가지의 세부 내용이다. 이것은 기존의 아라한관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내용들이며 경전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우선 첫째에서 말하는 부정이란, 정액을 말하는 것으로 몽정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의 내용인 해탈에 대한 무지는 아라한은 해탈에 대한 자각(解脫智見)이 발생한다고 하는 내용과 상충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이래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을 하면, 바로 해탈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신이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되었음을 여실하게 알게 된다.
세 번째, 해탈했음에도 여전히 의문이나 의혹이 남아 있다는 것은 『논사』의 설명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라한은 세 가지 번뇌(유신견, 의심, 계금취견)를 이미 완전하게 끊었기에 의문이나 의혹이 남아 있지 않으며, 『상윳따 니까야』에 나오는 ‘일체를 증득하여 알지 못하면 고통을 소멸하지 못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다만 『논사』에서 상좌부가 인정하는 아라한의 무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풀이나 장작, 나무와 같은 것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뿐이다.
네 번째, 다른 사람에 의존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당신은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깨닫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라한은 스스로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깨달으며, 바른 지혜를 통해 깨닫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다섯 번째는 ‘아아!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말의 반복을 통해 성스러운 진리를 자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수행을 통해 진리를 증득한다고 하는 것과 상충되는 주장을 말한다.
그런데 이처럼 대천의 주장을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하면 그만일까?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대천이 주장한 내용들이 당시까지 승단을 이끌고 왔던 아라한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불교계에는 아라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지닌 수행자 그룹이 존재했을 개연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아라한으로 추앙받고 있던 일부 수행자들의 실상을 어쩌면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는 대천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폭로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들 문제는 당시 불교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 일으켰음은 사실인 듯하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을 지녔다고 하는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문헌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5사가 제기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대략 아쇼까 대왕 이전이거나 치세시에 일어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는 부파의 지말분열이 본격화 되던 시기로 기존의 승단에 반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라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기존 상좌부나 설일체유부와 같은 주류 교단에 대한 반발의 확산과 더불어 새로운 이상적 수행자상에 대한 승단 내외의 시대적 요구의 발로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대승불교의 대두와 함께, 수행자의 이상적 모델로서 아라한대신에 보살관념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