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버트 그레이프' 포스터

삶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면 나는 KBS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프로를 보게 되면 삶이 불행으로부터의 도전이라는 진리 정도는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간극장>에 나오는, 갓난아기를 둔 엄마는 어느 날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거지요. 그래도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감사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얻은 것에 고마워하는 거지요. 자신의 귀여운 아기를 하루라도 더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할 지 무덤덤한 나도 눈물 몇 방울 흘렸습니다.

어디 <인간극장>에 나오는 사람들만 힘들겠습니까? 일명 ‘행복전도사’라 불리던 최윤희 씨까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개고’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뜻이지요. 부정적이고 숙명적인 냄새가 팍팍 나는 이 세계관이 불교 세계관 중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 라고도 합니다. 괴로움이 바다처럼 끝이 없다는 뜻이지요.

부처님은 불나방이 불 속을 뛰어드는 상황이라고 하셨고, 낭떠러지에 서있는 한 그루 나무에 위태하게 매달린 사람의 처지로 인간의 삶을 관찰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이라는 거지요. 너무 비관적인가요? 그런데 사실인 걸 어쩌겠어요.

다음 영화를 보게 되면 아마도 부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입니다. ‘고해’와 ‘일체개고’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들입니다.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어둡고 긴 터널에 갇힌 주인공의 상황을 통해 삶의 고단함을 잘 표현한 영화들입니다.

<개 같은 내 인생>으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이 만든 <길버트 그레이프>와 토드 솔론즈 감독의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가 바로 그 영화들입니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피터 헤지스라는 작가가 쓴 장편소설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괴롭히는가?>를  원작으로 했습니다. 여기서 그 무엇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삶의 부조리함을 끔찍한 가족이라는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한 거지요.

그리고 유명한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 1996년도 대상작인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감독은 이 작품을 청소년기에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아이들이 겪는 삶의 고통이 생생하고 진지하게 묘사됐습니다.

먼저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조니 뎁)를 보면, 정말 숨이 막힙니다. 이 청년이 처한 상황은 쥐구멍에는 절대로 볕들 날이 없다 입니다. 아버지가 자살한 후 어머니는 몸무게가 무려 225킬로그램이나 불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조차도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머니만도 버거운데 남동생은 한 술 더 떠 저능아이기까지 합니다. 조용하고 얌전한 저능아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럼 길버트의 짐이 무겁다고도 않겠지요. 동생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말썽꾸러기입니다. 이 아이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걸 좋아해서 어느 날은 소방대원까지 출동하게 만든 마을의 골칫거리입니다. 이밖에 노처녀 누나와 불만만 많은 사춘기 여동생이 있습니다. 이들이 길버트의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는 표현 보다는 길버트의 짐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한편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주인공 돈 위너의 삶 또한 길버트 못지않습니다. 돈 위너는 중학교 1학년 왕따 소녀입니다. ‘전따’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전교생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마땅히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할 정도입니다. 무시만 하면 좋을 텐데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무리들까지 있습니다.

▲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포스터

어떤 여자애는 돈 위너가 자기 남자친구를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화장실로 끌고 가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X를 싸라고 위협하고, 또 어떤 남학생은 강간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돈 위너에게는 집도 결코 평화를 느낄만한 곳이 아닙니다. 엄마는 계모라도 되는 것처럼 돈 위너를 차별합니다. 똑똑한 오빠와 애교 많고 귀여운 여동생만 좋아해서 노골적으로 돈 위너를 왕따 시킵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것은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저능아라는 놀림을 받는 수모까지 당합니다. 이렇게 돈 위너의 중학교 1학년은 끔찍하다 못해 처참합니다.

이 고통이 특별한 시기만의 문제일까요?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왜 ‘일체개고’라고 했겠습니까? 삶이 지속되는 한 고통도 지속된다는 걸 이 영화들은 보여줍니다.

돈 위너는 미래는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빠에게 묻습니다.
“오빠, 고등학교는 어때?”
오빠의 대답이 인생에 대한 명료한 답입니다.
“지금하고 똑같아.”

얼마나 끔찍한 대답입니까? 지금하고 똑같다니. 길버트도 돈 위너도 지금하고 똑같은 미래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보다 가벼워지고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진 그런 미래를 기대하기에 지금 삶이 고단한데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돈 위너의 오빠는 희망의 싹을 싹둑 잘라 버립니다. 

<길버트 그레이프>를 봐도 오빠의 답이 정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길버트는 언제나 집을 떠나서 좀 가볍고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두 여동생도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면서 가족이 해체된 거지요.

그래서 길버트는 혼자 그가 원하던 곳으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짐이 내려지면 그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듯 길버트는 자신이 살던 집과 마을을 떠나면서 혹 하나를 달고 갑니다. 골칫덩이 동생 어니를 데리고 떠나는 거지요. 이 마지막 장면에서 누구나 상상할 수 있습니다. 길버트는 여전히 힘들 것이라는 걸. 머무는 공간만 바뀌었을 뿐 그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걸.

<길버트 그레이프>의 길버트와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돈 위너를 보면 ‘일체개고’와 ‘고해’ 세계관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힌 이들의 삶이 고해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고해겠습니까?

우리라고 이들과 다를까요? 이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가 처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미래는 나아질 거야’라는 주문을 외면서 어리석게도 마음은 미래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돈 위너와 길버트는 속삭입니다. “미래도 똑같아” 하고요.

-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