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이 만드는 불교영화는 대부분 달라이 라마에 관한 영화입니다. 현대 미국영화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또한 달라이 라마로부터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든 <쿤둔 Kundun>(미국, 1997) 이라는 영화에는,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가 선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임을 입증 받는 2세에서 시작해 조국 티베트를 떠나 인도로 망명길에 오르는 18세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지혜의 화신’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 라마에 대해 마틴 스콜세지는 ‘슈퍼맨’에 대한 환상을 갖고 접근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스스로에 대해 “난 그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승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영화는 달라이 라마에게 비범한 존재의 역할을 맡기고, 그 초점 안에 머물렀습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과 같은 영화에 열광했던 서구인들에게서 달라이 라마는 또 다른 모습의 영웅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철저하게 영웅주의 영화의 문법을 따릅니다.

달라이 라마의 비범함은 탄생에서 시작합니다. 2살 때 라모 된둡은 아버지의 자리를 자신의 자리라고 우깁니다. 전생에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였기에 항상 상석에 앉았었는데 그 습관이 남아서인지 보통 애들과 달리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오히려 중심이 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 달라이 라마에 대한 묘사는, 이렇게 전생의 그림자를 찾는 범주에 머뭅니다.

환생에 대해 철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인 달라이 라마는 불사조처럼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돌아가시면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기 시작합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입적에 들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꼭 다시 환생한다고 티베트 사람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13대 달라이라마가 열반에 든 후에도 환생자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라모 된둡이 이 조건에 부합했습니다.

소년은 태어날 때 불교의 성조인 까마귀가 소년을 지켰으며, 포탈라궁이 있는 라싸에 가겠다고 하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같은 종류의 물건 가운데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용했던 물건을 찾아내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마침내 소년은 14대 달라이 라마가 됩니다. 평범한 소년 라모 된둡이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임을 인정받고 쿤둔이 되는 과정은 신비의 영역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기대하게 됩니다. 14대로 이어지는 긴 시간을 이어오면서 최고의 불교 교육을 받았고, 또 명상수행에 정진해왔기에 무언가 남다를 것이라고. 또 그는 관세음보살 현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중생과는 다른 면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이 기대는 앞에서 소년이 달라이 라마로 검증받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신비주의적인 것과는 다른 기대입니다. 우리가 달라이 라마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지혜와 자비입니다.

영화 <쿤둔>에서 달라이 라마가 성장했던 환경은 우리의 기대를 입증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되고 나서 사춘기 소년이었을 때 티베트는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종교는 아편과 같아서 백성을 미혹하게 한다’는 사상으로 무장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죽이고, 티베트 문화를 말살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암살하려는 기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달라이 라마는 인도 북부 다람살라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게 달라이 라마가 조국 티베트를 잃고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 이유입니다.

조국을 떠나 다람살라로 망명하기까지 격동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소년이 보여준 모습은 결코 범상치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나라를 잃는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으므로 달라이 라마는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힘든 시기 달라이 라마가 보여준 행동은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자기 조국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 모택동을 만납니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달라이 라마와 노련한 정치가였던 모택동의 만남에서 달라이라마가 밀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달라이 라마는 모택동의 주장에 말 한 마디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티베트는 힘이 없고, 중국은 강했으므로.

그런데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달라이 라마는 아주 천진한 말을 합니다. 모택동을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인줄 알았는데 그 또한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모택동에 대해 사소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구두가 반짝였다는 것, 소매가 닳아서 반질반질했다는 것을. 이런 면을 기억한다는 것은, 모택동을 인간적으로 접근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적에 해당하는 상대방을 ‘나’와 대적해 있는 적으로 보기 보다는 그냥 인간으로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런 보기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는 생각’이나 ‘우리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서 보면, 부처님의 전생에서 인욕선인이었을 때 가리왕에게 사지를 찢기는 고통을 당하였을 때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상’ 즉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아상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관세음 보살의 현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몸을 찢는 가리왕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던 인욕선인처럼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강한 적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또한 비폭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서양인들이 영화나 책 등을 통해 중국의 야만적인 행동을 규탄하고 티베트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 <쿤둔>도 가만히 살펴보면, 중국의 티베트 침입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고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어려서 중국의 침입을 받았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한없이 바랬었는데, 그래서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영국이나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침묵했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앞 다퉈 달라이 라마를 도와주려 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에게 노벨평화상을 주고,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티베트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티베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침묵하던 그들이 무슨 변덕이 생겨 갑자기 티베트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달라이라마에게 열광할까요? 답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달라이라마는 조국 티베트를 잃고 세상을 얻었다는 말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달라이 라마의 지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 나라를 잃고, 세상을 얻는 일이 결코 우연히 얻어진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를 잃은 지도자로 인도 변방에서 초라한 삶을 연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티베트 불교를 세상에 알렸고, 달마의 중국 전법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결코 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달라이라마는 ‘지혜의 화신’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달라이라마가 인도 국경을 통해 망명길에 오르는 중 어린 병사가 묻습니다. 누구냐고. 그때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통해 너의 모습을 보기를 기대한다.”

즉 달라이라마는 인간이면서 지혜와 자비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또한 내면에 결코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지혜와 자비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즉 그것을 발굴하고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마틴 스콜세지는 지금까지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성난 황소> 등을 통해 밑바닥 삶을 묘사했었습니다.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이해했을 때 동물의 삶을 살 수도, 성인의 삶을 살 수도 있는데, 스스로 동물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추악한 삶을 파헤치는 데 골몰했던 감독은 이들의 냄새나는 삶에 완전히 지쳤는지 그는 갑자기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을 찾아 나섰고, 그렇게 해서 발견해낸 것이 달라이라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틴 스콜세지의 <쿤둔>은 가장 훌륭한 인간에 대한 보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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