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의 맥을 잇는 방법은 대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원형’을 지키는 장점도 있지만, 동시대의 속성과 커다란 낙차를 가지고 있어 문화적 타자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으로 사상이나 기법을 가져와 대중성과 현대성을 더하는 게 있다. 이는 대중문화라는 사회문화적 콘텍스트(context) 위에서 구성하는 일로, ‘재현’보다는 ‘변형(혹은 포장)’에 주목해, 문화적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최초의 창(窓)을 들라면, 단연 그림책이 아닐까. 그래서 그림책의 그림과 글 하나 하나는 아이들의 내적 성장에 자양분이 될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사유’의 틀을 형성할 때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그림책 한 권을 엮기 위해 화가·작가·편집자 모두가 ‘다른 어떤 책보다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매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윤덕(화가·그림책 작가, 사진) 작가 역시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적잖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권 작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글과 그림에는 소통과 포용을 좇는 리얼리티(reality)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최근 펴낸 《일과 도구》(길벗어린이 펴냄)에서는 ‘고려불화’의 기법을 적극 수용한 그림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여느 그림책 작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한 색감의 그림체는 이미 자녀를 둔 ‘엄마독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회자되고 있다.
“그림책은 아이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일으키도록 배려해야 해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통한 상상력을 아이들이 일으킬 수 있도록 글과 그림을 서로 어울리게 해야 하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책을 보는 아이의 엄마와 같은 마음은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여는 데 바탕이 되었다.
“고려불화의 배채(背色)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같은 색채라도 따뜻하면서 튀지 않는 색상을 만들 수 있어서

아이들의 그림책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요.”
《일과 도구》에서 권 작가는 세심한 공필(工筆)의 기교와 색채의 섬려함이 돋보이는 그림을 선보였다. 1995년 《만희네 집》을 펴내며 그림책 작가로 첫발을 내딛은 후, 형상·묘사 등의 표현기량을 키우고, 여기에 고려불화의 기법을 접목시켜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책의 토대를 한 단(壇) 쌓아올린 셈이다.
그림을 그릴 때 비단 뒷면에 물감을 칠해 전체적인 색감이 은은하게 우러나오도록 하는 고려불화의 배채 기법은 화폭 앞면으로 스며 나온 표면 위에 음영과 채색을 더한다. 권 작가는 《일과 도구》에서 고려불화의 특징으로 꼽히는 이 화법을 통해 필터링을 한 것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색감과 함께 섬세하면서도 맑은 색조의 투명성까지 표현해 냈다.
“고려불화의 화법을 사용해, 엷은 색[담채·淡彩]과 진하고 강하게 쓰는 색[진채·眞彩]을 함께 사용해 담담하면서도 필요한 곳은 화려한 색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채색했다.”는 그는 “비단에 그린 그림들이 일터와 그곳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 권윤덕 그림책 작가의 최신작 <일과 도구>에 게재된 그림
그는 1987년 안양에서 ‘우리그림’이라는 모임을 통해 불화를 처음 배웠다. ‘우리그림’은 당시 미술문화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젊은 화가들이 안양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아 결성한 모임으로, 탱화와 단청에 일가를 이룬 불모(佛母) 법수 스님(관악산 불성사 주지)이 회장을 맡았다. 그는 그때 스님께 사사하며, 불화의 세계를 조금씩 알아 갔다.
“스님께서는 불화도 열심히 가르치셨고, 제자들의 생활 안정과 신변 보호에도 각별하셨죠. ‘미술문화운동’을 추구하니, 제자들의 주머니는 항상 곤궁했고 또 관할 경찰서에서도 제자들에게 항상 촉각을 세웠던 탓이죠. 스님께서는 지금도 제자들과 함께 작업하시는 것을 좋아하세요. 저 역시 스님과 함께 두서너번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그리고 또 단청 작업도 했어요. 지금도 함께 작업하고 싶지만 여건이 쉽지는 않네요."
권 작가는 2006년 다시 스님에게 공부를 청해, 1년 남짓 불화를 공부했다. 《만희네 집》(1995) 발표 이후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1998), 《씹지않고꿀꺽 벌레는 정말 안 씹어》(2000), 《생각만해도깜짝벌레는 정말 잘 놀라》(2001), 《혼자서도신나벌레는 정말 신났어》(2002), 《시리동동 거미동동》(2003),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2005) 등을 펴내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일본·프랑스 아동문학 출판계 주류 작가로 성공했지만, 결코 안주할 수 없었다. ‘전통 채색화’ 기법으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엮은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미술문화운동을 할 때였죠. 공단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쳤어요. 그때 한 여성노동자의
그림이 제게 깊은 인상을 주었어요. 그녀에게 주었던 그림의 주제는 ‘우리의 일터’ 정도로 기억되는데, 여성노동자의 화폭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죠. 그것이 제게 큰 여운으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배채 기법으로 그린 그림책 《일과 도구》를 펴냈다. 권 작가가 미술운동을 하며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던 불화 공부의 성과와 여성노동자의 그림으로 깊게 패인 심연의 인상을 그대로 담아, 2년간의 노력으로 40여 컷의 비단 그림과 ‘소통’과 ‘포용’의 글로, ‘직업에 대한 차별 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책을 엮어낸 것이다.
“따뜻한 그림과 글로 아이들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행복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자연스레 그림뿐만 아니라 경전 공부도 시작했어요. 올해부터‘수유+너머연구실’에서 매주 한 차례 《디가니까야》(초기불전연구원 펴냄) 강독을 하고 있습니다.” 《디가니까야》에는 계율과 선정, 지혜 등에 대한 가르침 뿐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의 철학 사유를 62가지로 분류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연기법을 제시한 내용 등이 들어있다.
권윤덕 작가는 《일과 도구》 후속작으로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한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다. ‘한·중·일 평화 그림책 시리즈 12권’ 중 한 권을 맡은 것. 권 작가는 이미 나눔의 집을 수차례 방문했고, 관련 자료도 꼼꼼히 모으고 있다. 대구에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도 찾아가 만나보았다.
“문제는 ‘증오심’입니다. 그림 한 컷, 글 한 줄 모두 ‘증오심’이 배어나기 쉬운 주제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그림책인데, ‘반일감정’만 심어줄 수는 없잖아요. 저는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한 그림책에 ‘소통’과 ‘포용’을 담고 싶습니다. 역사를 왜곡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제 스스로의 마음이 순화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분명 경전 공부는 제게 그러한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권윤덕 그림책 작가의 최신작 <일과 도구>에 게재된 그림

오종욱 | 월간선원 편집실장

권윤덕 작가는
1960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한 권 작가는 잠시 북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987년부터 안양지역 미술문화운동단체에서 활동했다. 1993년 그림책 작업을 시작해, 첫 작품 『만희네 집』(1995)을 선보였다. 1998년에는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북경에 머물면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수묵화와 가는 붓으로 그리는 공필화를 배운 후 귀국한 후 관악산 불성사 법수 스님으로부터 다시 불화를 배우기도 했다. 그는 옛 그림의 미감을 그림책 속에 재현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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