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절에는 수다쟁이가 두 사람 있습니다. 이들 수다쟁이는 서로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로를 싫어하는 이유가, 상대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말이 많아서 싫다고, 침을 튀기며 흉보는 걸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른 수다쟁이를 욕하는 또 다른 수다쟁이는 자기는 수다쟁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자신도 말이 많으면서 말 많은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고 괴롭다면 그 모습 속에 내 모습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지만 사실 상대의 끔찍한 모습은 내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상대는 싫은 모습을 보여줘서 내게서 나쁜 습관을 고쳐주기 위한 불보살의 화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은 어린 소년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선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어느 한 사람도 필요 없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자만 밝히며 건들거리는 장꾼도, 술독에 파묻혀 세월을 죽이는 별 박사도 모두 그에게는 스승이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선재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머니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소년을 키워주고 가꿔주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절에서 만났던 수다스런 보살도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내게 깨달음을 주었으니까요. 이렇게 세상에는 스승 아닌 게 없습니다.

본격적인 구도영화를 표방한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은 고은의 소설 <화엄경>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한편 고은의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 <입법계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고은의 <화엄경>이 53선지식을 찾아가는 선재동자의 여정을 따라갔다면 장선우의 <화엄경>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어린 소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선재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이 박힌 노란 담요에 싸여 버려진 소년입니다. 한때는 전과자였으나 선재를 만나면서 넝마주의로 살아가는 문수에 의해 길러집니다. 그러다 그 문수마저 죽자 선재는 자신을 감쌌던 모포 한 장을 갖고 길을 떠납니다. 떠남의 목적은 ‘어머니를 찾아서’입니다. 그런데 단서라고는 담요 한 장밖에 없는데 이 넓은 세상에서 어떻게 어머니를 찾겠다는 것인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무모해보입니다.

선재의 아버지 문수는 죽기 전 선재에게 어머니를 찾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착한 사람을 보면 눈을 크게 뜨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돌리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어머니를 찾게 된다.”

문수의 사고는 이분법적입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편 가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관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무 자르듯 나와 남을 가르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르고, 좋은 이와 싫은 이를 가르고, 옳고 그름을 가르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가르면서 분열된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길을 떠난 후 가장 먼저 만난 법운을 보고 선재는 고개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비친 법운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승려이면서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는 법운의 모습이 어린 선재에게 좋을 리 없었습니다. 선재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법운은 자신이 먹은 술값과 밥값을 선재에게 지불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피리를 그 댓가로 주었습니다. 불지 못하는 거라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맡기고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껄렁해보였던 법운이 선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미리 나쁜 사람이라고 짐작하고 고개를 돌렸던 그 법운이 사실은 선재의 가장 큰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땡초로 보였던 법운은 어린 선재에게 문수와는 다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재의 원래 목적은 어머니인데 그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는 지혜라는 수단이 필요하고,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운의 생각은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야심경>에도 나오지만, ‘반야’라는 지혜를 통해 피안의 세계인 ‘바라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를 통해 ‘어머니’라는 상징으로 표현된 피안의 세계를 얻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재에게서 ‘어머니’라는 상징은 선불교적 표현을 빌리면 ‘불성’입니다.

때로는 ‘고향’이라고 표현하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선불교에서는 참선을 하고, 아미타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은 염불에 일념정진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재는 세상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즉 현실과 격리된 세계에서 홀로 수행하는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 속에서 깨달음을 구합니다.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배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식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상식적인 선지식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어린 아이에게 밥값을 내게 하는 법운을 시작으로 욕쟁이 의사 해운, 장기수 해경, 그리고 장님가수 이나와 별을 관찰하는 소년 김박사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장꾼 지오나 이련이라는 여인, 자비심이 넘치는 등대지기가 있습니다.

선재는 이들에게서 사람이 바다보다 우주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배우고, 평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소년 김 박사에게서는, 한 번 태어난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미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선재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법운의 가르침대로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지혜를 쌓았습니다. 지혜를 얻으면 어머니를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그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선재와 어머니의 만남은 영화의 절정이자 선재가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특별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긴 여행에 지친 선재는 어느 곳에 쓰러집니다. 쓰러져서 잠에 빠집니다. 꿈속에서 어머니라고 여겨지는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연꽃을 들고 있습니다. 매우 성스러워 보이는 모습입니다.

선재를 낳아준 물리적 어머니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어머니, 즉 신의 영역을 느끼게 하는 어머니입니다. 선재는 마침내 그 어머니의 품에서 참으로 깊고 편안한 잠을 잡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나는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어 언제나 네 옆에 있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항상 그의 옆에 있었고, 선재가 긴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장꾼 지오, 법운 스님, 장님가수 이나, 평등을 가르쳤던 감옥의 해경, 바닷가 무료봉사 의사 해운, 그리고, 선재의 아이를 낳았던 이련 이라는 여인 등 이 모든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가르쳐준 것입니다.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선재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이전의 선재와 작별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날 만큼 어머니와의 만남은 특별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선재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선재가 노란 담요를 들고 열심히 찾아 헤매던 ‘어머니’라는 존재는 결국 자기 불성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이 바깥세계, 세상 속에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모든 모습이 결국 나와 뗄 수 없는 나의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문수의 가르침처럼 나쁜 이를 만나 고개를 돌려버린다면 결코 내 불성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법운의 가르침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선지식으로 대하고,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배워 지혜를 기를 때 우리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은 꽤 난해한 영화였습니다. 솔직히 원작인 고은의 <화엄경> 또한 읽다가 포기해버렸을 정도로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뿌리인 <화엄경> <입법계품>은 읽을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경전 <화엄경>에 도전해 보고픈 욕구를 느꼈습니다. 영화도 이토록 많은 가르침을 주는데 경전은 얼마나 많은 보물을 담고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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