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부유층 노인과 윤락업에 종사하는 여성 등 모두 21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여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유영철 사건을 모델로 한 영화 <추격자>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이 우문이라는 건 압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다고 2천5백 년 전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을 통해서 유영철도 영화의 주인공도 분명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이니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화를 보면서 부처님의 말씀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부처님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괴물은 뼛속까지 괴물이고 살인자는 절대로 인간이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와 부처님의 말씀은 충돌하는 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악마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영화는 악마는 영원히 악마일 뿐이라고, 악마가 착해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날 수 없다고, 부처님과 완전히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기에 영화를 보면서 혼란을 겪은 것입니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에는 영민(하정우)이라는 살인자가 나옵니다. 그가 경찰서에서 자백할 때 보인 모습은 그의 성향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을 13명 죽였다고 자백할 때 보인 태도는, 마치 무용담을 털어놓는 아이의 모습처럼 자랑스러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털어놓았습니다.

이 말은 결국 그가 13명의 사람을 죽였지만 그의 엄청난 과거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그가 사람 죽이는 일을 파리 한 마리 때려잡는 것처럼 하찮게 생각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영민의 의식 속에는 사람의 목숨에 대한 존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지요.


영민의 문제는, 사람은 죽이면 안 된다, 는 도덕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걸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인간의 고유한 특성 중의 하나인 자비심만 있어도 결코 이런 일은 저지르지 않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자비심이 없었습니다.

영민이 주로 죽인 사람은 출장 안마소(보도방) 여종업원들이었습니다. 영민은 그녀들의 머리에 정을 박아서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속에서 만족을 얻은 것입니다. 상대방의 고통과 두려움을 지켜보면서 연민을 느껴야 하는 게 정상인데, 자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처럼 메마르고 삭막한 영민의 마음은, 엉뚱하게도 상대의 고통을 통해서 만족을 얻은 것입니다.

자비심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특성인데,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은, 그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정신은 동물에 더 가깝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영화에는 이런 종류의 인면수심의 인간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양들의 침묵>을 필두로 타란티노 감독의 출세작 <저수지의 개들>의 미스터 브론드, 코엔형제의 최고작 <파고>의 유괴범 게이어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사람을 해하는 미스터 브론드에게 살인은 그저 유흥에 가까웠고, 게이어 또한 텔레비전 보는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추격자>의 영민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만족의 도구로서 사람의 목숨이 이용됐던 것입니다.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는 만족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하기에, 그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추격자>의 영민을 통해서 일반적인 악마의 특성을 살펴보면, 생명존중이라는 도덕의식이 없고, 인간의 특성인 자비심이 없는 것까지는 거의 동물에 유사하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특성인 아집에 사로잡혀서 오직 본능적 쾌락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동물과도 비교가 안 되는 모습이지요. 적어도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살생을 하지 쾌락을 위해서 살생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고, 악마에 가까운 영민을 불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가 개과천선하는 일은 꿈에서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영민에게서 어떻게 불성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요? 이는 바위에서 나무의 특성을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아주 어렵고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는데, 세상에 부처님이 출현한다면 영민처럼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악마와 다름없는 종류의 인간들에게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다음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 또한 희망을 주는 동시에 절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악마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부처님이 출현해야 가능하기에 또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부처님 시대에도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희대의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어머니까지 죽이려했던 이 살인마의 이름은 앙굴리마라입니다. <추격자>의 영민이 죽인 사람 21명이니 그는 영민을 능가하는 살인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살기로 번득였고, 광기에 사로잡힌 앙굴리마라를 피해 사람들은 밖으로 마음 놓고 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위협적이었습니다.

이런 극악무도한 살인자와 부처님의 만남은 꽤 극적이었습니다. 살인자는 99명의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 한 명을 더 죽여 100명의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마지막 희생자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잡기 위해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부처님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멈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멈추었다. 그런데 너는 멈추지를 못하고 있구나.”

이상했습니다. 계속 앞으로 가면서 멈추었다고 하고, 오히려 자신더러 멈추라고 하는 사문이 참으로 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앙굴리마라에게 다음 설법을 해주었습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탐진치를 멈추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탐욕과 살기에 사로잡혀 있다.”

깨달은 이의 이 말은 앙굴리마라에게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즉 자신의 현 상태를 직시하고,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참회한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살기에 가득한 그 마음을 쉬게 되니까 죄 또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천수경>에서는 이런 경지를 참된 참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앙굴리마라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앙굴리마라는 순식간에 흑에서 백으로 변한 것이지요. 아무리 밤이 깊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세상이 환해지는 것처럼 부처님처럼 최상승의 경지에 오른 존재는 앙굴리마라와 같은 악인조차도 깨달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앙굴리마라 이야기를 통해서 영민도 불성이 있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출현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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