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년 음력 5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이때, 〈불교저널〉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근대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외세 침략이라는 네거티브한 시류에 맞서 전통적 한국불교의 포지티브한 에너지를 결집한 구심점이었습니다. 선학원의 창립은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국민들에게 선과 악을 넘어선 불성(자연적 본성)을 키우기 위해 선을 대중에게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불교저널〉은 다시 한 번 포지티브한 에너지를 결집하여 근대 한국불교의 맥을 살린 그 설립조사 스님들의 뜻을 21세기 오늘에 구현하는 데 힘쓸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상(我相) 중심적인 옮음’에 치우쳐 개인의 입장만 내세우고 강요하는 사회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아상 중심의 내세움은 결국 분열과 갈등을 낳고 건강하고 따뜻한 에너지를 감소시켜, 중도(中道)를 해칠 것입니다. 또한 아상 중심적 옮음은 순수성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필연적으로 편협성의 반가치를 동반하고 결국 배타적인 독선으로 나아가 타자에 대한 혐오감을 노출합니다. 아상 중심적 옳음은 결국 이념적 당위에 매몰돼 화쟁의 길은 요원해 지고 말 것입니다. 〈불교저널〉은 이념적 당위의 사유가 아닌 주체적 실존의 사유로 우리 사회의 ‘화쟁의 길’을 모색하고 ‘중도의 길’을 가겠습니다. 중도의 길로 불국토로 가는 문을 열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너는 어느 편이냐’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불교계 역시 그렇습니다. 편 가르기 역시 아상 중심적입니다. 교단이 어려움을 겪을수록 ‘어느 편이냐’는 분열은 더욱 깊어집니다. 사부대중을 한쪽 편에 세우는 것이 불교발전에 어떤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편에 속해야만 지성이고, 언론다운 것인지 의문입니다. 불교는 나 중심이거나 우리 중심이라는 편 가르기를 부채질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이기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리이타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자리이타에는 ‘어느 편’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와 나를 가르면 결국 우리는 공멸할 것입니다. 화합하고 지혜를 살리는 길이 불교가 살아야 할 길이고, 국민이 살아갈 길일 것입니다. 그래도, 혹자가 묻는다면 〈불교저널〉은 ‘삼보(三寶)의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포지티브 에너지로 충만합니다. ‘불교의 내일을 여는 힘’은 이 포지티브 에너지를 결집하는 데서 비롯될 것입니다. 이른 새벽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입으로는 불보살의 명호를 외며 절을 찾는 노 보살의 신심에서, 개인적 노동 터를 포교의 장으로 바꾸는 운전기사 불자들에게서, 깨달음을 향한 처절한 구도의 현장에서 수행의 끈을 놓지 않는 납자들의 눈까지, 〈불교저널〉은 드러나지 않은 포지티브한 에너지를 찾아 한국불교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전하겠습니다.

이타적 자리심(自利心)으로 어떤 일에 몰입하는 선기(禪氣)를 좇겠습니다. 이러한 선기는 산사(山寺)에도 있고, 포교당에도 있으며,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기는 포교와 복지 현장에도, 문화와 경영 일선에도 존재할 것입니다.〈불교저널〉은 세상에 가득한 긍정적 선기를 찾아 한국불교의 사기 진작의 원동력을 제공하겠습니다. 또 이타적 선기의 긍정적 사고로 창조적 사고를 이끌고, 이러한 에너지를 모아 세상에 알리고 미래 한국불교의 원동력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오늘의 불교는, 불자는 물론 모든 국민들이 요구하는 삶의 전체적 지혜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카데미 차원의 답으로는 아상 중심적 현실을 깨뜨리기 어려웠고, 역사적 사실의 변화에 능동적 사유로 즉답하지 못하고 지혜 없는 무미건조한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불교저널〉은 지식과 지능을 드러내기 보다는 이타적 본성(불성)을 살리는 삶의 길잡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불교의 원동력이 될 포지티브한 에너지는 자기주장으로 상대방을 억누르는 감정의 사회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고요하게 진정시키는 정신문화의 생활화에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복락의 사회’는 우리의 불성(본성)이 살아 숨 쉬는 사회일 것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본성을 긍정적 욕망의 분출로 승화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출가자가 수행하고 싶은 욕망, 포교사가 포교하고 싶은 욕망, 운전자는 운전을 잘하고 싶은 욕망, 이 같은 욕망이 이기배타적이지 않고 자리이타적 욕망으로 승화되는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관심을 기울이겠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려는 욕망이 곧 출가자의 본분이듯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스스로 기쁘고 편안하게 존재하기 위해 힘쓰는 모든 원력을 〈불교저널〉은 지지할 것입니다.

언론자유는 이념과 지향성에 의한 통제가 아닌 사실과 의견, 존재와 가치를 구별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이것이 무엇인가’에 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추상화하고 이념화하는 대신 불가능해 보일지 모를 사실적 언어를 확보하겠습니다. 아상 중심적 사유의 틀이나 논리의 질서 속에 사실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겠습니다. 내 입장의 말하기보다 화쟁의 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언론은 말하기에 앞장서 왔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저널〉은 말하기보다 ‘듣기’에 열중하겠습니다.

〈불교저널〉을 세상에 보이며 벅찬 꿈을 품어 봅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땅에 널리 퍼지는 꿈, 깨달음을 구하려는 수행자들의 존재적 본성이 이 땅에 가득차는 꿈, 수행자를 좇아 세상을 기쁘고 편안하게 만들고자 나서는 대중이 넘치는 꿈, 그들로 인해 이 세상이 행복해 지는 꿈. 불가능해 보이지만 우리가 가야 할 그 꿈을 사부대중과 함께 꾸며보고자 합니다.

〈불교저널〉의 꿈이 사부대중의 꿈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의 관심과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서현욱/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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