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황색 물결의 파노라마 속에 한 시대의 풍운아가 멀고 먼 길을 떠났다. 그의 여행이 결코 자의적 선택의 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은 말했다. “아, 님은 떠났지만 우리는 결단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그러나 그의 여행은 열정과 혼돈이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로 다가와 있다.

한 인간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 이토록 말이 많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실존적 종말을 의미하는 그의 여행은 그의 의지를 떠나 남은 자들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해석 속에서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말처럼 원망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탓하고 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정치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정치적 역경을 운명이라 말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편 가르기 병폐에 대한 회한과 절망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가 말한 운명이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가? 여전히 주판알을 튕기며 그의 여행을 담보로 삼고자 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인가?

그의 여행으로 빈자리가 되었을 그가 있던 곳은 물리적 시공의 범주를 벗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윤회의 궤적은 불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것은 ‘삼사라(윤회)’이며, 살아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한 윤회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이 절대주의의 부활을 초래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해석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의도와 달리 현실은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문화가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여행이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자나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묘사하는 자나 역시 절대주의적 사고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을 떠난 사람은 그냥 아름다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축원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가 남긴 윤회의 흔적은 이 사회의 청량제가 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이제 그의 여행이 편 가르기의 도구가 되어선 곤란하다. 정치란 이름으로 자행된 살인을 미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의 자살이 찬양되어서도 안 된다. 극단적인 두 시각을 통합하고 지양하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이제 유스토 노거사의 길고 긴 여행과 함께 또 하나의 여행이 준비되고 있다. 불교저널의 여행이 그것이다. 여행이란 표현보다는 遊泳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지만 단순한 헤엄이 아니라 새로운 불교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여행이란 점에서 박수를 쳐야 한다. 박수만 칠 것이 아니라 그 여행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부처님은 다섯 명의 비구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의 여행은 3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만들었다. 내면의 빛을 강조한 그의 가르침은 느린듯하면서도 세상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부처님은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너와 다른 사람의 생각도 존중하라. 너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때 너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또한 말한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편견과 자기 범주에 갇혀 살고 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은 못난 것이거나 무익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내편이 아니기에 미움의 대상이 된다. 부처를 부처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활용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제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은 관념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때맞추어 등장하는 〈불교저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실 속에 살아 숨 쉴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 작은 출발이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렇지만 언제나 따스함을 잃지 않는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 유스토 노거사와 같이 열광적인 환송은 없더라도 언제나 미소로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이길 기대한다.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은 여행이어야 한다.

차차석/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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