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신과 함께 가라>

▲ 영화 <달마야, 서울 가자>

육상효 감독이 만든 <달마야, 서울 가자>(2004, 한국)와 독일 영화 <신과 함께 가라>(2003, 졸탄 슈피란델리 감독)에는 모두 수도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산사나 수도원에서 세상과 담 쌓고 살았기에 세상 물정을 모릅니다. 두 영화는 이들 순진한 수도자들의 바깥세상 이야기입니다.

<신과 함께 가라>와 <달마야 서울 가자>는 겉모습은 참 비슷합니다. 성직자들이 수도원과 절 밖으로 나오면서 낯선 세상과 부딪친다는 설정이 우선 닮았고, 간간이 웃겨준다는 것도 닮았습니다.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신과 함께 가라>는 종교영화의 길을 걷고, <달마야 서울 가자>는 코미디 영화의 범주에 속하니까 완전히 다른 길을 갑니다.

같은 출발선에 서있던 두 영화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과 함께 가라>는 제목에서처럼 신의 길을 가는 수행자의 영적 성장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고 코믹은 수단일 뿐입니다. 반면에 <달마야, 서울 가자>는 웃기는 게 목적이고 종교는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부님들이 걸은 구도자의 길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신과 함께 가라>의 신부님들은 칸도리안 교단 소속인데, 이 교단은 노래를 통한 찬양과 기도를 수행방법으로 삼는 교단으로 오래전에 카톨릭 교단에서 파문당하고 두 개의 수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보잘 것 없는 교단입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수도원은 독일에 있는 아우스부르크 수도원입니다. 다른 한 수도원은 이탈리아에 있는데 영화는 세 명의 수사가 독일 수도원을 나와 이탈리아 수도원을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젊었을 좀 놀아본 벤노 신부님, 그리고 신부인지 농부인지 헷갈리는 요리담당 타실로 신부님, 그리고 아기 때 수도원에 버려져서 세상이라고는 모르는 꽃미남 신부인 아르보 수사는 보리죽과 우유만 먹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들은 노래를 통해 신과 하나 되는 순간에 만족하면서 세상과 담 쌓고 살다가 후원자가 끊기면서 모두 굶어죽을 처지에 놓이자 종단의 규범집을 들고 이탈리아의 수도원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는 설정 면에서는 <달마야 서울 가자>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달마야 서울 가자>의 스님들이 서울로 상경하게 된 목적은 노스님의 유품을 서울 무심사에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산골 절 스님들이 마침내 자는 사람 코도 베어 간다는 살벌한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이번 상경의 길 대장은 청명스님입니다. 이 스님은 자기에게든 남에게든 좀 엄격한 인상을 줍니다. 한마디로 스님계의 범생이지요. 그리고 현각스님, 이 스님은 <신과 함께 가라>의 타실로 수사처럼 몸을 쓰는 일을 주로 하는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대봉스님이라고 묵언 수행하는 스님인데, 묵언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마야, 서울 가자>는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캐릭터가 분명하게 차별화되고 산사에서 나오는 과정에서는 그래도 수행자의 모습을 조금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오면서 이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달마야, 서울 가자>에서 스님들은 서울에 올라와 큰 스님의 유품을 전해줘야 할 사찰인 무심사가 빚 때문에 건달들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한 걸 알아채고는 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 과정이 질 낮은 코미디 수준에서 전개됩니다. 스님들이 절을 되찾기 위해 술도 마시고 노래방 가서 노래도 걸쭉하게 부르고 그리고 결국은 복권으로 탄 3백억을 통해 절을 되찾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스님은 조금도 스님답지 못했습니다. 옷만 승복을 입었을 뿐이지 일반인보다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건달들과 전혀 차별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으며, 이 영화에서 수행자의 삶을 느끼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반면에 <신과 함께 가라>의 신부님들에게서는 그들 앞에 놓인 세상의 삶이 수행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고 그걸 극복해내는 모습에서 수행자의 삶을 느끼게 했으며 신과 함께 가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른 신부님은 농부스타일의 타실로 수사입니다. 이탈리아 가는 길에 고향에 들린 그는 다 늙은 엄마가 혼자서 많은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자 혈육의 정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일행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자신은 엄마 일을 좀 더 거들어주고 뒤따라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타실로가 엄마 때문에 수행자를 포기하는구나 하고 낙담했는데 나중에 타실로는 엄마에 대한 연민이나 정보다 신에 대한 갈망이 더 크다는 걸 확인하고 동료들을 쫒아옵니다. 신과 함께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애정임을, 즉 혈육의 정임을 보여줬습니다.

다음 장애물은 명예욕입니다. 이 명예욕은 지적 욕망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 욕망의 덫에 걸린 이는 영화에서 가장 지적인 모습으로 나오는 벤노 수사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가는 길에 신학교 동기를 만나고, 동기가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신학교에 데려가 희귀 악보를 보여주면서 신학교에서 함께 살자고 하자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진짜 신이 없습니다. 미사도 드리지 않고 교장은 벤츠를 타고 다니고 오직 물질에 대한 숭배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타실로와 아르보가 명예욕에 빠진 밴노를 구하기 위해 찬양을 하자 그 노랫소리 속에서 벤노는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런 겉치레나 명예욕이 아니라 신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자각을 하고 신학교를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르보입니다. 아르보의 욕망은 앞의 두 사람에 비해서 좀 더 강했습니다. 아르보 수사는 애기 때부터 수도원에서만 자랐기에 여자라는 존재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와 키아라라는 여기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애욕의 상징인 여자와 신이 함께 가는 건 불가능하지요. 부처님께서도 수행의 길에서 애욕을 가장 경계하셨는데, 신의 길을 걷는 아르보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 나타났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아르보는 신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갑니다. 즉 신을 버리고 키아라를 선택합니다. 아직 어린 아르보에게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선택이고 오히려 이런 결론이 이 영화를 훨씬 완성도 있는 영화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르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압니다. 인간의 길을 간 아르보가 어느 날 다시 신을 그리워할 거라는 걸. 젊은 어느 시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지만 신만큼 안온한 안식처와 행복을 주는 곳은 없기에 언젠가 다시 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걸.

그렇다면 웃음의 질과 양 면에서는 두 영화는 어떤 차이를 보일까요? 웃음에 집착했던 <달마야, 서울 가자>가 당연히 더 웃겼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의 길을 갔던 <신과 함께 가라>의 웃음이 더 진솔하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웃음이었고, <달마야, 서울 가자>의 웃음은 처음에 크게 터졌다가 나중에는 지겹다 못해 짜증이 나는 웃음이었습니다.

불교영화의 탈을 쓴 코미디 영화 <달마야, 서울 가자>와 구도영화 <신과 함께 가라>를 같은 선상에 놓고 다루는 것 자체가 심하게 억지스럽지만 우리나라에도 제대로 된 불교영화 한 편 쯤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무리한 시도를 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에도 <신과 함께 가라> 스타일의 불교영화 한 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불교영화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처럼 지나치게 진지한 톤이어서 재미가 없거나 <달마야>시리즈처럼 그냥 웃기기 위해 불교에서 소재를 가져온 영화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류 다 극단으로 갔습니다. 종교성을 강조하면 재미가 없고, 재미를 쫓다보면 종교성은 온데 간 데 없어지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과 함께 가라>의 재미와 종교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실력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 김은주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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