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뷰티플 마인드'(Beautiful Mind, 2001)의 포스터

어렸을 때 이웃에 믿음이 좋은 가족이 살았다. 그 집 막내딸과 친구였고, 이런 친구를 둔 덕에 교회에 자주 드나들었다. 거기 가면 찬송가도 배우고 사탕이니 연필이니 선물도 받을 수 있어서 교회에 다녔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끔씩 다녔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알게 모르게 기독교적 가치관에 물들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걸 보면.

사람이 죽으면 몸뚱이는 땅에 묻히는 순간 흙으로 사라지지만 영혼은 그렇게 허무하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천국으로 가서 행복하게 살고, 나쁜 일을 하게 되면 지옥에 간다고 여겼다. 즉 영혼은 아무개라는 이름표와 함께 이생과 저생을 넘나들며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운명인 육체보다는 항상 존재하는 영혼이 진짜 ‘나’라고 생각했다.

20여 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육신은 없어져도 영혼은 영원하다’는 나의 확고한 믿음이 깨졌을 때 적잖이 당황하게 됐다. 20살 때 불교인에게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我)’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 딱히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말이다.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영혼이 없다면 난 이생에서 끝나버리는 건가? 육체의 소멸과 함께 나라는 존재는 영원히 사라지는가? 쉽게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이전에 듣도 보도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것이기에 구미가 당겼다.

이렇게 시작된 불교에 대한 의문은 <금강경>을 접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됐다. 금강경에서는 ‘내가 없다’는 것에서 한 술 더 떠 내가 보고 만지고 만나는 모든 게 환상이라는 것이다.

꿈속에서 로또에 당첨된다 하더라도 깨어나면 도루묵인 것처럼 우리가 환상에 불과한 현실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이 또한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구체적으로 와 닿지가 않고, 누군가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하고 물어도 명쾌하게 대답해줄 만큼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었다.

물론 금강경이 언어 이전의 깨달음의 소리기에 언어적으로 이해시킬 그런 진리가 아니고, 벼락처럼 단번에 깨달아야 할 그런 진리기에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금강경을 해석해 놓은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어봤지만 뾰족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어떤 책에서도 명쾌하게 안개가 걷히는 느낌은 없었다. 전혀 뜻밖의 이 영화를 만나기 전까지는.

▲ 존 내쉬(러셀 크로우 분)
<금강경>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일대기를 영화로 그린 <뷰티플 마인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천재와 광기가 뒤섞인 한 개인의 삶을 바라보다가 금강경이 전하는 진리를 문득 깨닫게 됐다.

<뷰티플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쉬는 한때는 제2의 아인슈타인으로 추앙받으며 MIT 교수로 전격 발탁되는 등 앞날이 촉망받는 수학자였다. 그런데 인생의 절정기인 어느 날 그에게 홀연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존 내쉬에게만 보인다. 즉 그에게 환상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상은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는 환상을 보는 것이고, 존 내쉬 또한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환상 속에서 살 때가 많다. 그의 환상 속에는 그의 오만함을 부추기는, 과대망상적인 성격이 농후한 정보기관의 인물도 나오지만 외로움을 보여주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친구가 없는 그에게 유일하게 말벗이 돼주는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영문학을 전공하는 룸메이트와 어린 소녀다.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상 속에서 만나는 이들을 현실로 착각하면서 환상 속의 인물들과 교우하며 수년의 시간을 보낸다. 물론 자신을 절대로 정신분열증 환자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는 현실보다는 환상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현실과의 갈등은 점점 고조돼 가며, 그의 실제적 삶은 어려워져만 간다. 사람들도 한 명씩 떠나가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진다. 옛날의 명성은 온데 간데 없으며, 광기에 빠진 정신병자로 전락해 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처럼 미쳐가던 어느 날, 이런 최악의 현실을 단박에 바꿔버릴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 홀연히 찾아온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항상 만나는 어린 소녀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만고만하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어느덧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 자라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 가는데, 오직 그 소녀만 여전히 그대로라는 사실이 그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 봐, 너 미쳤잖아. 네가 보는 거 다 거짓이야. 다른 사람 눈에는 그 애 안 보여. 그 애는 네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해.’

아내고 남들이 다 ‘너는 환상에 빠져있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만나서 말도 하고 보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을 도저히 환상이라고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다는 벼락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면서 그는 이 대단한 발견을 계기로 자신이 환상 속에서 살아왔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존 내쉬의 삶은 변화를 맞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명언인 것이 존 내쉬의 경우에서도 입증된다. 자신이 환상에 빠져 사는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성큼 도약하는 것이다.

자신이 보는 것이 환상임을 자각하자 그는 환상을 외면해 버린다. 룸메이트가 나타나고 정보기관의 남자가 나타나고 해도 더 이상 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환상 속 인물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수학에 매달려 마침내 199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된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존 내쉬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환상을 환상으로 바라보고 ‘넌 거기에 있구나’ 하면서 환상과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환상에 결코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존 내쉬의 처지에 나를 대입시켜 놓고 보면, 내가 보고 만나고 하는 모든 게 환상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연기처럼 사라질 환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내쉬의 경우처럼 환상으로 자각해야 한다는 것, 환상임을 궂게 믿어버려야 한다는 걸, <뷰티플마인드>를 보면서 절감했다. 그리고 이것이 <금강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깨닫게 됐다.

- 김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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