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阿羅漢)은 본래 빠-리어 Arahat, 산스끄리뜨어 Arhat를 음사한 한역어로, 한자 에는 의미가 없고, 원어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역 경전에는 원어의 의미를 취한 번역어와 소리를 딴 음사어가 혼재되어 있다. 그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나한(羅漢) ② 상인(上人) ③ 응진(應真) ④ 진인(眞人) ⑤ 아라하(阿羅訶) ⑥ 응공(應供)

이렇듯 다양한 번역어/음사어가 아라한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한역의 역사를 보면, 불타야사와 축불념 이래, 즉 A.D.413년 이후에는 거의가 ‘아라한’으로 통일되어 사용된다.
사실 아라한은 대승불교에서는 소승의 성자로 폄하되어 있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보살보다는 낯선 용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사찰에 가보면, 사찰 한켠에 아라한을 모셔놓은 전각을 볼 수 있다. 전각의 이름은 대부분 응진전 혹은 나한전으로 되어 있다. 쉽게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이들 전각에는 500나한이나 700나한들이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모셔져 있는데, 그 하나 하나의 표정이 모두 달라 ,보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느낌을 준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희화화된 나한상들을 보면, 대승불교권의 아라한에 대한 이해를 또한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연재를 통해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아라한은 초기불교, 부파불교에서 수행자들의 이상적 모델이었다. 그렇기에, 아라한이란 말이 갖고 있는 의미는 우리들이 느끼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우선, 그 말의 의미를 빠-리어 단어 자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빠-리어 Arahat는 동사어근 √arh(가치 있다. 존경할만 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어근의 의미를 충실히 따르면 ‘존경할 만한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키면, ‘공양받을 만한 자’란 의미가 된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이 의미를 취해, ‘응공(應供)’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응공이란 의미에서 아라한은 공양받을 만한 수행승이란 의미와 함께, 재가자(천신을 포함하여)들에게는 아라한에게 공양함으로써 복을 심을 수 있는 복전(福田)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같이 나타낸다.
그럼, 왜 아라한은 공양받을 만한 수행승이며, 재가자들에게는 복을 심을 수 있는 복전이 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초기경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지만, 붓다고사 스님의 설명에서 가장 함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붓다고사 스님은 잘 알려져 있듯이, 기원 후 5세기 무렵의 스님으로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인 주석가이다. 스님이 지은 󰡔청정도론(Visuddhimagga)󰡕은 상좌부 불교의 핵심을 체계화한 논서로 유명하다. 붓다고사 스님은 바로 이 논서에서 아라한을 유사한 단어의 의미를 취해 네 가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을 통해 우리는 왜 아라한이 공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행승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번뇌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
둘째, 번뇌라고 하는 적(ari)과 재생이라고 하는 바퀴(ara)를 파괴했다.
셋째, 생활필수품 등을 받을 만하다.
넷째, 비밀스럽게 악행을 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붓다고사 스님의 해석은 아라한의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붓다고사 스님의 해석은 다시 세 가지 관점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재생의 원인이 되는 번뇌를 완전히 파괴하여, 더 이상 재생하지 않는 청정한 존재이다.’ 이는 수행의 완성자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해탈의 성취이다. 이 해탈은 다름아닌 번뇌의 소멸로부터 성취되는 것이다. 번뇌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것이기에, 번뇌의 단절은 또한 윤회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라한은 해탈을 성취한 자이며, 열반을 성취한 자가 된다.
둘째, ‘아라한은 다른 수행자나 재가자와 달리 남이 보지 않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결코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잘못된 행위, 즉 악행은 음란한 행위나 삿된 행위를 말한다. 온갖 번뇌를 소멸시킨 아라한이기에, 악행을 행할 원인이 되는 번뇌에 다시 물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홀로 있든, 대중과 함께 있든 아라한은 도덕적으로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다.’ 수행의 완성을 통해 해탈을 성취한 자이며, 도덕적으로 완성된 자로, 뭇 사람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는 자이기에 공양을 받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이렇듯 아라한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임을 붓다고사 스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고사 스님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이러한 아라한의 완벽성을 노래하고 있는 게송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상응부경전의 게송을 소개해 본다.

실로, 아라한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갈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만심은 끊어졌고, 어리석음의 그물은 파괴되었다.
탐애심이 없어졌으며, 그들의 마음은 청정하다.
이 세상에서 집착이 없는 그들은 범천과 같은 존재이며, 번뇌가 없는 존재이다.
오온을 잘 알고, 일곱가지 선한 법의 영역에서 즐기는 사람들이다.
마땅히 칭찬되어야할 선인들이며, 깨달은 자의 참다운 자식들이다.
일곱 가지의 보배를 갖춘 사람들이며, 세 가지 배움을 배운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갈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학의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고, 마지막 몸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 게송을 보노라면, 왜 아라한이 천신과 인간들로부터 공양받을 만한 존재인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무엇보다도 탐진치 삼독의 번뇌를 정복한 청정한 존재라는 점만으로도 아라한은 공양받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세상사람들로부터 공경과 공양을 받으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이 삼독심을 덜어내는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시대에 아라한이 요청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새해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전이 될 수 있는 씨앗을 심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필원/청주대 강사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