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 쇠고기 파동, 종교편향 등의 문제로 시끌벅적했던 2008년이 지나고, 2009년 기축년(己丑年)이 밝았다. 기축년을 상징하는 소는, 오래전부터 불가에서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심법전수의 수단으로 삼았다. 절마다 ‘소를 찾는 그림[심우도]’을 벽에 돌려가며 그려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온순하고 끈질긴 성격으로 농경 중심 사회에서 인간들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이다.>

불교와 소의 관계는 밀접하기 그지없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태자 때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인데 성(姓)에 해당하는 ‘고타마’의 뜻은 ‘가장 좋은 소’, ‘거룩한 소’란 의미로 부처님 당시 농경(農耕) 중심의 가치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법당 벽화 심우도(尋牛圖)에서도 소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불가에서 소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하는데, 이 때문에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를 그렸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도 자신의 호를 ‘소를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의 목우자(牧牛子)로 삼았다고 한다. 또 만해 한용운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 이름을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의 의미를 담은 ‘심우장(尋牛莊)’으로 짓는 등 소는 불교와 친근한 동물이었다. 원래 심우도는 곽암 선사(송나라)에 의해 『화엄경』의 ‘미륵불 출세’를 상징화하여 그렸다고 하지만, 지금에서는 심법(心法)을 닦아 본래자성을 찾는 심우(心牛)가 된 셈이다.

‘모성과 충절의 동물’

우리나라에서 소는 가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유군사시역제천살우관제이점길흉제해자위흉합자위길(有軍事時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이라 하여 전쟁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발굽의 상태로 길흉을 점쳤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소는 단순히 농경을 돕고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하는 가축이상의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아닌 남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버리는 행위를 일컬어 ‘희생(犧牲)’이라 하는데 이 또한 본디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물에서 유래한 말로 모두 소를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제물로 쓰이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고려대에서는 ‘장생서(掌牲署)’, 조선시대에는 ‘전생서(典牲暑)’라 하여 별도로 전담하는 관청을 두었고, 특히 설농탕의 유래가 된 선농단(先農檀)의 제사시에도 반드시 소를 썼으며 오늘날 가정에서 지내는 각종 제사에도 ‘쇠고기 적’을 쓰고 있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한서』 양서전에 보면 계륵의 고사로 유명한 양서가 자신의 뛰어난 재주로 인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양서의 아비인 ‘양표’가 부모와 자식지간의 지극한 정을 표현한 ‘지독지애(犢之愛)’란 말이 있는데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는다는 뜻이니 소가 지닌 지극한 모성을 상징하고 있는 예이다.
아울러 소는 충절의 상징으로도 여겼는데 주인을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 죽은 의로운 소를 기린 삼강행실도의 ‘의우도(義牛圖)’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성성과 친근성을 두루 갖춘 소를 함부로 잡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신라 법흥왕과 성덕왕, 백제 법왕 때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하령금살생(下令禁殺生)’했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보면 “극히 일부의 상류층에서만 고기를 먹고 일반 백성은 불교를 좋아하여 살생을 하지 않으므로 도살하는 방법도 서툴다”라고 적고 있다.

‘풍요와 희생의 동물’

우리 민속에는 특히 소가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우리민속이 농경문화 중심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에 농사의 주역인 소가 여러 풍속과 깊은 관련을 맺어왔다는 증거다. 소와 관련된 민속행사는 그해의 풍년들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새해의 첫 보름달과 가장 풍성한 보름달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과 추석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정월의 소날에는 특별히 잘 먹이고 대보름 전날 밤에는 하루에 세 번씩 먹는 소에게 한 번씩 더 준다. 이때는 사람이 먹는 것을 그대로 차려준다. 이때 소가 쌀을 먼저 먹으면 쌀풍년 콩을 먼저 먹으면 목화풍년 등으로 점쳤다. 또 입춘날을 기해서는 소방아리 붙이기라해서 소를 훈련시키는 의미로 집에서 먹였던 소를 논밭에 끌고가 쟁기를 씌워 몇두렁의 땅을 뜨게 했다.
팔월 추석무렵에는 농촌에서 두 사람이 각각 궁둥이를 대고 엎드린 후, 그 위에 멍석을 씌워 소 모양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앞에서 소고삐를 잡고 마을 부잣집으로 찾아가 "소가 배고파서 왔으니 여물을 주시오"라고 소리치면 주인이 일행을 맞아 갖은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무렵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는 인조소를 만들어 소머리대기라는 놀이를 하기도 했고 경남일대에서는 봄부터 여름내 소먹이는 아이들이 소 싸움을 붙이고 힘센소를 선발해 칠월 백중이나 팔월 한가위 무렵에 넓은 모 래사장이나 풀밭에서마을대항 소싸움도 벌였다.
제주도에서는 농사를 권하고 풍년을 축원하는 행사로 입춘날 짚으로 만든 소에다 바퀴를 달고 앞에서 씨를 뿌리며 풍년을 기원했다. 이 행사 때에는 무당들도 일제히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지방에는 짚 이난 멍석을 이용하여 소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대여섯 사람이 들어가 소처 럼 꾸며 움직인다. 이들은 마부와 무당과 함께 풍악을 울리고 재담을 하며 놀기도 했다.
또한 소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수많은 속담에 등장하며 친숙함을 더한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어라.’, ‘소같이 일한다.’는 근면성, ‘소가 크면 왕 노릇하나.’, ‘쇠귀에 경 읽기.’는 어리석음, ‘느린 소도 성낼 적 있다.’는 온순함, ‘소 죽은 귀신같다.’는 고집스러움을 표현했는데, 이처럼 다양한 속담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정서를 담았다.

■청량사 삼각우총(淸凉寺 三角牛塚)
청량사(淸凉寺) 유리보전 앞에는 세 갈래로 자란 노송 한 그루가 있다. 절에서는 이 자리를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부르니, 곧 세 개의 뿔을 가진 소무덤인 셈이다. 여기에는 소와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산 아래 마을에 남민이라는 사람의 집에 뿔이 세 개가 난 송아지가 태어났다. 점차 자라면서 다른 소와 달리 몇 달만에 낙타만큼 커졌다. 이에 힘은 매우 셌지만, 성격이 매우 사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연대사(蓮臺寺)의 스님이 주인의 양해를 얻고 송아지를 절로 데려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데 사용하였다. 송아지는 이후부터 매우 양순하고 부지런히 일했다. 세월이 흘러 소는 숨을 거뒀고, 절에서는 정성껏 묻어 왕생을 축원해 주었다. 얼마 후 소를 묻었던 자리에서 소나무가 자라나 세 갈래의 가지가 돋았고, 지금까지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산야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이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는 선조들의 여유와 정서가 가파른 산중턱에 절을 조성하였던 고단한 현실 속에 스며있는 이야기이다.

■계룡산 갑사 공우탑(功牛塔)
충남 공주 갑사를 오르다 보면 스님들이 소의 공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3층 석탑인 ‘공우탑(功牛塔)’을 만날 수 있다. 공우탑에 얽힌 사연은 4백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 조선에 침입한 왜구들이 절에 불을 지르고, 문화유산을 약탈해 가는 등 노략질을 일삼아 수많은 사찰이 잿더미로 변했다. 갑사를 증건 키 위해 인호(印浩), 경순(敬淳), 성안(性安) 스님 등이 시주를 받는 등 각방으로 진력을 다 했으나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뉘 보다도 골똘히 노심초사하던 인호 스님의 어느 날 꿈에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내가 지어 줄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라고 하지 않는가. 꿈에서 깨어 난 스님이 밖에 나가 보니 과연 소 한 마리가 서 있지 않던가. 이로부터 소가 필요한 자재를 끌고 지고 옮기어서 갑사 중건이 매듭짓게 된다. 전생에 어떤 ‘존재’의 화신이던가. 힘을 다 쏟은 소가 지치고 병들어 죽는다. 소의 공을 고맙게 여긴 승려들 이를 가려 탑을 세웠다.

박소은/MBC 구성작가

기축년 불교소사
689년 - 승려 전길(詮吉) 등 50여명, 일본에 건너감.
809년 - 해안사(海眼寺, 조선 인조 때 은해사라 개칭)를 창건, 원찰(願刹)로 삼음.
989년 - 여가, 공사·한인경 등과 함께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귀국.
1049년 - 혜소 정현, 왕사(王師)에 임명됨.
1109년 - 예종(睿宗) 2월 29일 및 9월 24일에 각각 회경전에서 백좌회(百座會)를 개설, 중외(中外)에서 승려 3만을 공양.
1169년 - 3월 3일 왕이 서경으로 순행(巡幸)하여, 소문(疏文)을 몸소 지어 산호정(山呼亭)에서 나한재(羅漢齋)를 개설.
1229년 - 7월 7일 정각 지겸 화엄사서 입적.
1289년 - 7월 8일 목암 일연, 국존(國尊) 인각사에서 입적.
1409년 - 일본 승려 주호(周護), 대장경 요청.
1469년 - 경국대전 초안 완성. 도승(度僧) 및 사사조례(寺社條例)를 규정. -양주 봉선사 창건. -오대산 상원사를 세조(世祖) 원찰(願刹)로 삼음.
1589년 - 청허 휴정·사명 유정,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모함으로 구금됐다가 무죄 석방.
1649년 - 11월 21일 소요 태능 입적. 1709년 -2월 8일 상봉 정원 입적.
1889년 - 제2차 사찰승니(寺刹僧尼) 비호령(庇護令) 내림.
1949년 - 3월 일제에 의해 침탈된 문화재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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