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성도지 보드가야 대탑 안의 석가모니 불상

싯닷타는 음식을 먹기로 결정하고 보드가야(Bodhgaya)의 네란자라(Nerañjarā, 尼連禪) 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수자따(Sujātā)가 올린 우유죽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는 강 부근에 있는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자리를 깔고 앉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그의 마지막 정진 중에 마라(māra, 惡魔)들이 나타나 방해와 유혹이 있었으나 이를 모두 항복받은 이후 깊은 선정에 들어간다.

초선(初禪)에 이어 차례로 제2선, 제3선, 제4선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는 4선에 의해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인간의 생사문제로 향하게 하였더니, 초저녁에는 천안통(天眼通)와 한밤중에는 숙명지(宿命智)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새벽에는 누진지(漏盡智)를 통해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해탈(解脫)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解脫知見]. 이렇게 하여 싯닷타는 12월 8일, 35세에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 샛별을 보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최상의 바르고 참된 도를 얻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었다.

위의 글은 싯닷타가 6년간의 죽음을 무릅쓴 고행을 중단하고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뒤에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한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갓 불교에 입문한 불자이라면 이 정도로 붓다의 성도 과정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불교 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담고 있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불자를 위해서라도 좀더 상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싯닷타가 음식을 먹고 목욕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당시 인도의 고행주의자들은 단식을 위주로 수행하였고, 목욕이나 편안한 잠자리도 금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그가 6년 동안 해왔던 일체의 고행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그는 극한의 고행이 심신의 정화에 일부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몸을 혹사시킨 상태에서는 궁극적으로 평온한 열반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점은 불교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이전에 했던 선정주의[마음]나 고행주의[몸]라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수행을 그만두고,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수행의 길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릴 적 농경제에 나갔다가 잠부나무 그늘 밑에서 초선(初禪)에 들었던 때를 떠올렸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찾고자 했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으로 싯닷타가 고행을 포기하는 순간 마라(Marā, 惡魔)가 나타났다고 한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마라는 싯닷타가 출가한 이후로 7년간 따라다녔는데 그에게 빈틈을 찾지 못하다가 이때 비로소 “고행에 의해서 청정해지는데 그런 길을 버린 사람이 청정하지도 않은 것을 스스로 청정하다고 여긴다.”고 속삭였다 한다. 이에 싯닷타는 단호한 태도로 “악마이며 사악한 자여, 고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계․정․혜를 닦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마라는 싯닷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긴장감을 늦추어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이런 마라의 출현은 우리의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욕망과 감정의 갈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숫타니파타󰡕에서 싯닷타가 마라의 성향에 대해 탐욕, 증오, 기갈, 애착, 권태와 수면, 공포, 의혹, 허영과 고집 등으로 언급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체 욕망과 번뇌를 소멸한 붓다에게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마라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전에 의하면 붓다의 정각 이후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늦추게 되면 여지없이 마라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붓다가 정각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라가 나타나 전도(傳道)를 반대하였고 두 차례나 붓다에게 바로 입멸에 들 것을 권유하였고, 석가족의 정치적 상황을 염려하고 있던 붓다에게 마라가 나타나 통치자의 길을 가면 히말라야 산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속삭였으며, 심지어 붓다는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었지만 마라의 권고로 열반에 들기로 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마라가 출현한 장소와 정황은 결과적으로 붓다의 굳은 의지와 승리를 대부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붓다라 하더라도 난감한 현실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심리적 갈등이나 유혹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깨달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깨달음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붓다를 붓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청정한 행위의 실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싯닷타는 마지막 정진에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것이다. 초기불전에서는 붓다의 성도(成道) 과정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략 15가지 정도의 이설(異說)이 있으며 크게 네 가지[①4성제(四聖諦)․12연기(十二緣起), ②37조도(三十七助道), ③5온(五蘊)․12처(十二處), ④사선(四禪)․삼명(三明)]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사선(四禪)과 삼명(三明)의 체득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선(사)은 색계(色界)에 있어서 선정의 상태에 따라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한 것이며,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을 총칭한 말이다. 사선은 싯닷타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수행자들에게도, 그리고 정각을 이룬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공통되는 수행방법이다. 초선은 감각적 욕망[欲]을 버리고 악(惡)하고 불건전한 상태[不善]를 떠남으로 해서 기쁨[喜]과 즐거움[樂]을 느끼는 단계이지만, 아직 대상에 대해 분별[覺]하고 사려[觀]하는 마음의 작용이 남아 있다. 제2선은 앞의 분별․사려하는 마음속 잡념이 사라지자 안으로 고요한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선정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단계이다. 제3선은 앞에서 체험한 선정의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로써 몸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지는 단계이다. 제4선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고 근심도 기쁨도 없이 단지 평정(平靜)한 마음뿐인 사념청정(捨念淸淨)의 단계이다.

싯닷타는 이렇게 사선의 수행으로 순일하게 집중되고 평정한 마음 상태에 도달하자, 자신의 마음을 중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싯닷타는 범부의 안목을 뛰어넘는 천안(天眼)의 눈으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중생들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는 또다시 죽는다. 때로는 아름답고 또는 추하게, 때로는 안락한 곳에서 또는 괴로운 곳에서 태어나는 등 빈부귀천의 여러 계층이 있지만, 저마다 자기가 지은 업(業, kamma)에 따라 그와 같이 살고 죽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는 초저녁 무렵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
다시 싯닷타는 전과 같이 선정에 들어 자신의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복잡하게 얽힌 지난 생, 수십․백․천․만 생의 과거,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회상했다. 어떤 종족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슨 이름으로 어떻게 살았으며,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났던가 하는 지난 생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상기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중생들에 대해서 낱낱이 세밀한 점까지 확실하게 전생 일을 생각해 내는 지혜인 숙명지(宿命智)를 한밤중 무렵 얻었다.

보드가야 대탑

또다시 싯닷타는 이전처럼 선정에 들어 번뇌의 본질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그는 감각적 욕망이 곧 번뇌의 뿌리이며, 생존에 대한 갈망과 어리석은 견해가 곧 번뇌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가를 보았다. 그러한 성향에 따라 선택되고 형성된 것들은 결국 불만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마침내 실망과 괴로움, 좌절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하면 이들 좋은 것과 싫은 것, 갈망과 증오심을 제거하고, 완전한 해탈로 향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명료하게 꿰뚫어봄으로써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확신하자,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해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새벽 무렵 누진지(漏盡智)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싯닷타는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마침내 붓다(Buddha)가 되었다.

끝으로 싯닷타는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神)이나 초자연적 존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직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 최선의 자질을 완성하고 지혜와 자비를 구현한 분이었다. 또한 그는 영혼을 구제하는 구세주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부단한 노력과 깨달음으로 실증해 보였다. 그리고 고(苦)로부터 해탈을 달성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고 가르친 분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붓다가 처음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당면 과제인 해탈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나 신이나 초월자 등 외부에 의탁하거나 구하지 말고, 연구와 분석을 통해 그 해결의 길을 스스로 찾아내어 자신이 가진 내면의 힘과 자질을 꾸준히 계발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용/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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