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하늘이 무너지랴 땅이 꺼지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자식 잃은 고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인의 슬픔에 대해서 들은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절망에 빠진 그녀는 부처님께서 던진 희망에 집착했습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냐면, 죽음이 없었던 집을 찾아내서 그 집에서 겨자씨를 한 주먹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잃은 여인은 그런 집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한 집 두 집 몇 날 며 칠 몇 개월을 그렇게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요? 결과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녀는 부처님이 내주신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당연히 실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죽을 것 같던 기분이 많이 가벼워지고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점점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이런 과제를 내주신 것은 죽음은 내게만 오는 문제가 아니고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이 진리를 깨달은 것이었지요.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야 하고, 또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요. 부자이던 가난한 사람이던 병든 사람이던 건강한 사람이던 늙은 사람이던 젊은 사람이던 가리지 않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죽음이라는 한계상항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요.

그녀가 절망으로부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명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통스러웠는데 차츰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그녀는 마침내 아들의 죽음 이라는 극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죽은 아들을 둔 여인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벤자민 버튼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다른 사람과 좀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늙어가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벤자민은 여든 살 노인네로 태어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젊어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갓난아기가 돼버립니다.

왜 이런 시도를 했냐고요? 영화는 본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에피소드를 하나 끼워 넣었는데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이 시퀀스를 통해서 그 의도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이 태어나던 날 뉴올리언스 역에는 시계가 걸립니다. 이 시계는 특이하게 거꾸로 가는 시계입니다. 맹인 시계공이 만든 시계입니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시계를 만들었냐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 귀하디귀한 아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한 줌의 재가 돼 돌아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 당시의 자식을 잃은 어머니처럼 자식을 살리고 싶은 염원을 갖게 됩니다. 그 바람이 얼마큼 강렬할 지는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두문불출한 채 오직 거꾸로 가는 시계 만들기에 몰두합니다. 시계가 거꾸로 흘러서 자식이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의 시간, 즉 자식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시계공의 염원은 죽음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이 시계공의 죽음에 대한 저항감에서 태어난 아이가 벤자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벤자민 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거절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보통 태어남과 동시에 늙는다는 말처럼 우리는, 살아간다는 자체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만약 거꾸로 시간이 흐른다면 어쩌면 영원히 살지 않을까, 죽음 같은 거 우리를 피해가지 않을까, 하는 발상에서 이 영화는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한계상황인 죽음에 대한 인간의 반항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영화는 '거꾸로 가는 시간' 이라는 모티브와는 상반되게 영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즉 우리는 죽은 아들을 둔 여인의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죽은 아들을 둔 여인이 돼서 죽지 않은 집을 찾아다녔던 우리는 뜻밖에도 그 여인처럼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부처님께서 불쌍한 어머니에게 주신 깨달음인, 이 세상에 죽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까 죽음을 수용해서 차라리 편안해져라, 입니다.

이러한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벤자민의 인생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예인선 선장이 죽는 장면입니다. 죽음수용의 적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선장은 총포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어갑니다. 죽는 순간 그는 이런 명언을 남깁니다.

"삶이 마음에 안 들면 욕을 하고 반항할 수도 있어.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받아들여야 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수용이고, 죽음에 대한 수용의식을 꽤 적절하게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바다를 떠돌면서 거칠게 살았던 뱃사람의 입에서 나온 성찰입니다.

거꾸로 가는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영원히 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벤자민 버튼 또한 영화 말미에서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돼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거꾸로 가는 시간을 살았던 벤자민도 죽음 앞에서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피해갈 수 없었지요. 영화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지요. 거봐, 벤자민도 죽잖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고요.

참 아이러니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영생을 추구했던 영화가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소 묵직한 메시지를 주는 게요. 왜냐면 영원히 살아간다는 건 판타지에서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인 게지요. 부처님께서 여인에게 준 메시지는 순리이고 진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음' 이라는, 헐리우드 영화로는 색다른 주제를 들고 나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에서 출발했습니다. 50여쪽 분량의 단편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작가 에릭 로스는 모티브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모두 새롭게 꾸몄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흥행영화를 만들었던 작가의 솜씨라서 영화는 볼거리도 풍성합니다. 벤자민이 12살, 데이지(케이트 블랑쉐)가 6살 때 시작된, 둘의 한평생을 이어가는 인연과 사랑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특별한 삶을 부여받았지만 우리들과 별로 다르지 않게 성장하는 벤자민의 성장과정이 또 다른 축을 이룹니다. '죽음' 이라는 묵직한 알맹이를 멜로드라마와 성장기라는 포장지로 싼 격이지요. 그래서 영화는 2시간 3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을 갖고 있지만 별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 김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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