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의 <꿈>과 춘원의 <꿈>


배창호 감독의 영화 <꿈>은 춘원의 소설 <꿈>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둘 다 <삼국유사>의 ‘조신이야기’에서 비롯된 ‘인생무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이 사상을 바탕으로 현실이 악몽이라는 현실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현실은 꿈속과 다르지 않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편입니다.

허나 두 장르는 꿈 속 인물의 형상화에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입니다. 소설 속 인물이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 인물이라면, 영화 속 인물은 욕망을 초월했습니다. 이런 차이는 꿈에서 깨어나는 상황의 차별성을 통해서 뚜렷해지는데, 이런 차이점을 관찰하면서 두 장르를 지켜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영화<꿈>(1990)은 보는 이의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으로 더 많은 자극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보이지 않는 소재인 아편중독이라던가, 매춘이라던가, 나병이라던가, 하는 인간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소재들을 끌어왔으며, 이런 장치들을 통해 주인공들을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법납이 10년이나 된 승려에게 불사음을 비롯한 불살생 등 가장 중요한 5계를 파계하게 함은 물론 평범한 사람조차도 접근하기 어려운 비참하고 비굴한 상황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의 상황에서 주인공 조신은 철저한 파멸이 아닌 승화를 선택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그는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처음 그가 출발했던 지점까지 올라갔습니다.

아내에게 매춘을 강요하면서 밥을 빌어먹고 아편에 미쳐있던 그가 서서히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무 것도 욕심내지 않고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처음처럼, 그는 백발의 노인이 돼 다시 부처님 앞에 엎드립니다. ‘탕자 돌아오다’라는 말에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조신이 꿈에서 깨어나기 전의 처지, 이 처지는 소설과 사뭇 다른데 이 차이점이 영화와 소설을 가르는 분기점이 됐습니다. 영화에서 조신은 참회와 회한 후 한층 성숙된 단계에서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이 설정은, 금강경의 세계관에 가까웠습니다.

금강경에서도 꿈에서 깨어날 것을 말하는데, 그 방법은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을 만큼 성숙된 단계, 형상을 넘어서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 단계가 돼야 자신의 진정한 자아인 불성과 만날 수 있고, 현실이라고 믿었던 가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달례가 떠난 후 조신은 달례를 찾아 전국을 떠돌다가 달례의 죽음을 전해 듣습니다. 달례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조신을 채우고 있던 달례에 대한 욕망, 즉 세상사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욕망이 사라진 후 그는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면서 수행에 전념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부처님 앞으로 다가오게 되고,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설 속 조신이 꿈에서 깨어나는 상황은 악몽의 절정에서였습니다. 손바닥을 불 가까이 접근했다가 불의 뜨거움에 깜짝 놀라서 ‘앗 뜨거’하는 심정처럼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악몽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깨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한때는 자신의 동료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삶에 위협적인 존재가 돼버린 평목이라는 스님을 살해한 후 살인에 대한 죄의식과 비밀이 들통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사형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소설 속 조신은 바로 이 사형의 순간에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왜 악몽의 절정에서 꿈에서 깨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데, 이 답은 악몽을 깬 후 악몽을 끔찍하게 여기고 현실에 안도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꿈꾸기 전 조신은 승려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달례와 연분을 맺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떼를 스는 철이 덜 든 승려였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 후 조신은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열심히 수행만하는 승려가 됐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생겨나게 됐을까요?  

이런 변화는 조신이 꿈속 경험을 통해 살얼음 같은 현실의 속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욕망이 바로 악몽이고, 악몽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인식입니다. 늘 쫓기는 기분, 이게 바로 우리고 발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걸 조신이 깨닫게 됐던 것입니다. 현실에는 우리가 마음을 둘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각성은 이 소설의 원작자인 춘원의 개인 경험과 어울려 진정성을 갖게 됐습니다. <꿈>의 원작자인 춘원은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또한 그의 처지가 소설에서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인생무상’을 표현하기에 적당했습니다. 한때는 우리나라 최고의 저술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해방 후 매국노로 지탄 받으며 산사에 은둔해있는 처지에서 이 소설을 썼던 것입니다. 

춘원의 <꿈>과 배창호의 <꿈>, 이들 두 장르는 불교사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이 현실의 악몽성을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면 영화는 악몽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데, 둘 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악몽이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데는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여호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또 그 얘기는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현실을 꿈속이라고 설정하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우리 각자의 꿈속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즉 내 꿈을 나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황당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세계관이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꿈>영화를 소설과 비교해서 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김은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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