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가 멀다고 염려하지 말며, 녹야원인들 어찌 멀다 하리오.
단지 걱정스런 것은 허공에 걸린 험한 길, 업장의 거센 바람은 괘념치 않네.
8탑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이리저리 영겁에 불탔구나.
어떻게 그 사람의 원(願)을 이루리오, 오늘 아침 바로 눈앞에 있구나.

— 혜초, 부처님의 성도지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에 도착하여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지난해 12월 한국에 돌아와 세계 최초로 공개되고 있다. 1283년 전 어느 20대 초반의 스님 한 분이 남긴 여행기는 결코 휘황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총 227행(한 행 17~36자), 결락자 없는 완전한 행은 210행이며 현존 글자는 5893자(전체 잔간 글자는 6379자)에 불과한 기행문. 세로 28.5cm, 가로 42cm의 두루마기 9장을 이어 붙인 358cm의 종이 위에 꾹꾹 눌러써진 소박한 한자들.

우리는 왜 혜초 스님에 열광하는가

지금 한국으로 돌아와 공개된 <왕오천축국전>은 그나마 더욱 짧다. <왕오천축국전>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임시대여’한 프랑스 측에선 제 몸의 6분의 1만을 공개하도록 ‘허락’했다. 그 씁쓸함과 아쉬움을 달래고자 우리말로 번역된 <왕오천축국전>을 손에 잡으면, 생각보다 훨씬 금세 읽힌다. 혜초 스님은 대개 말을 아끼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신이 본 것을 검박하게 글로 옮겼다. 전문가들은 그 여행기가 서술적으로 정밀하지도, 문학적으로 섬세하지도 않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여행기의 진본이 고국을 찾아 전시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열광하고 있다. 지난 2월초 이명박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 특별전을 찾아 “어려움을 이겨가며 탐험하고 진리를 추구한 큰스님이 계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라며 혜초에 대해 “참으로 위대한 스님, 위대한 문명 탐험가다”고 찬사를 보냈다. 오래전부터 혜초를 세상에 알리는 데 주력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은 “황홀한 친견의 순간, 뇌리에는 이 친견물과 반세기 이상 이어온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며 가슴벅차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 전시회를 감상했고, 앞으로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을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고도 한다.

<왕오천축국전>이 한국에 돌아와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은 불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당대 구법(求法)과 전법(傳法)의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혜초 스님이 부처님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왕오천축국전>이 그 생생한 증거임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또 존중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라고 설한 <금강경> 존중정교분의 가르침처럼, 비로소 공개된 <왕오천축국전>은 1300년 전 혜초가 품었던 ‘천축의 세계관’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 6~7세기 서역 남로의 호탄에서 제작된 여래 얼굴 틀(왼쪽)과 7~10세기의 보살 두상.


위법망구(爲法忘軀)의 모험, 순례를 위한 열정
 

<왕오천축국전>은 글자 그대로 천축의 다섯 나라를 순례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견문록이자 여행기이며, 구법의 길을 떠나 곳곳을 순례한 구도기(求道記)이다. 혜초가 약관 20세의 나이에 인도로 떠나 약 4년간(723~727) 서역의 약 40여 나라를 여행한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동시에 어느 모험심이 깊은 신라인이 인도와 중앙아시아, 나아가 아랍을 기행하며 그 풍물을 남긴 견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는 단지 불교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8세기 서역 문물에 관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수일 소장은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하고, 더욱이 아시아 대륙의 서단까지 다녀와 견문록을 남긴 전례는 없었다”고 말한다.

혜초 스님은 중국 남부의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남지나해를 통해 인도 동부로 들어간다.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스님이 인도 동부 바이샬리에서 “맨몸에 알몸으로 옷도 입지 않고 다니는 외도(外道)인 나체수행자들이 보인다”라고 자이나교도를 묘사하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어 부처님이 열반한 쿠시나가라, 최초의 설법지 바라나시 등의 불교 성지들을 참배한 혜초는 중천축에서 남천축으로, 그리고 서천축까지 갔다가 북천축으로 이동한다. 그런 다음 서역 대식국(大寔國: 아랍)의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몇몇 호국을 둘러보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구자국(龜玆國: 쿠차) 등지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대 국사학과 남동신 교수는 혜초의 직접적인 여행 동기가 마하보리사의 대탑을 비롯한 ‘8대탑’(8대 불교성지)을 순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통상 ‘구법’이라고 하면 불교 성지 참배와 더불어 새로운 불교 경전의 수집 내지 불교 교리의 수학 목적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앞선 시기의 구법승들과 달리, 혜초는 불교 경전을 입수하였다든가 불교 교리를 수학하지는 않았다는 것. 남 교수는 특히 <왕오천축국전>이 동아시아 불교 문헌 가운데에서 최초로 8대탑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8세기의 혜초뿐만 아니라, 3세기부터 11세기까지 대략 860여명의 동아시아 출신 구법승들이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 교수는 이중에서도 7세기 중반~8세기가 우리의 불교사 ․ 문화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고 주장한다. 이때부터 신라 역사가 세계와 호흡하고 있던 것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원효의 <기신론소> 사본이 중국 돈황에서 발견되었던 것은 그 생생한 사례 중 하나. 우리 불교는 적극적으로 인도와 중국 불교를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동아시아 불교계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 4~5세기에 제작된 금광명경(金光明經).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 소장.


천축과 신라, 고대와 현대를 잇는 ‘불교의 강(江)’

과연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이 시대의 스님들은 혜초를 비롯한 당대 스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 특별전에는 여러 스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일보사, (주)문화방송이 주최하고 조계종에서 후원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왕오천축국전>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를 드러내고 있는 220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지난 2월 18일에는 수덕사 방장이자 화계사 조실인 설정 스님과 스님 10여분, 신도 70여분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설정 스님을 비롯한 일행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 민병훈 부장과 오영선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유물들을 감상했다. 아시아의 역동적인 불교문화와 실크로드의 삶을 드러내고 있는 당시 유물들은 8세기 혜초가 여행했던 길을 따라 재구성되어 후세 한국의 스님들을 맞이했다.

특히 신쟝(新疆), 간쑤(甘肅), 닝샤(寧夏) 등 3개 성(省) 10여 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불교유물의 은은한 광휘는 스님과 신도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약 1세기부터 7세기까지 만들어졌던 금광명경(金光明經)과 석탑, 보살상과 여래좌상, 그리고 여래 인물도와 좌불상 벽화 등은 혜초를 비롯한 당대 스님들이 감탄한 서역의 불교문화를 오롯이 전해주고 있었다. 화계사의 한 신도는 그 유물들을 보며 “그 당시 사람들의 불심(佛心)과 우리의 그것이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상통한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설정 스님은 혜초 스님의 진본 <왕오천축국전>을 보며 “이러한 유물이 국내에 소장되지 못한 것에서 커다란 아쉬움과 비애를 느낀다”면서 “하루속히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의 역사의식을 세계에 과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설정 스님은 전시회를 감상한 후 “불교가 전하고 있는 사상의 흔적이 모든 인류의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며 “혜초 스님이 남긴 열정을 통해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동시에, 이를 우리의 삶을 새로이 정돈하고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화계사 수암 스님은 “오늘 전시회를 보며,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목숨을 걸고 그것을 선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고 말했다. 수암 스님은 이어 “그 당시 스님들에게는 천축이라는 성스러운 정신적 공간이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엔 어디에도 천축은 없다”고 말하며 “욕망으로 가득한 물질문명의 시대에 우리들은 치열한 수행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천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의 정신문화를 이끌 수 있는 혜초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오른쪽)이 18일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와 둔황'展을 찾아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감상하고 있다.

수정사 주지 원담 스님은 전시회를 감상한 후 고대 신라 사회가 결코 폐쇄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사회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구도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공부하러 떠났던 당시 스님들의 열린 마음과 자세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미 1000년도 훨씬 더 전에 그러한 안목과 탐구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것을 끝내 기록으로 남긴 스님들의 세계관이 경의스러울 뿐”이라면서 “그러한 넓고 열린 세계관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지난 1월 24일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해 총무원 부 ․ 실장 스님들과 종무원 등 200여 명이 이번 ‘실크로드와 둔황—혜초와 함께하는 서역 기행’ 특별전을 관람했다. 자승 스님은 “왕오천축국전을 친견하는 순간 구도를 향한 혜초 스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웠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와 함께 지금까지 100여분이 넘는 스님들이 특별전을 찾았으며, 동안거 해제가 끝난 후로는 스님들의 방문이 급격히 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스님들 또한 1300년 전 천축을 향해 꿋꿋이 발걸음을 옮긴 스님의 발자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듯 보인다.

일찍이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며, 그 여행은 또 하나의 먼 여행인 가슴으로부터 발에 이르는 여행에 의하여 완성된다”고 말했다. 혜초 스님이 천축을 향한 구도의 열정을 실현하며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찾았다면, 수암 스님의 말처럼 이제 세계에 ‘천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 안의 참된 마음을 찾아야 하는가. 그것이 미지(未知)와 경외의 빛이 사라진 시대에 <왕오천축국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닐까. 

- 박성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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