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 영화인 <아바타>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극장에서 나눠준 검은 안경을 착용해야 합니다. 마법의 안경은 관객을 다른 세계로 이동시켜줍니다. 어두운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은 갑자기 판도라 행성으로 이동하지요. 그리고 거기서 커다란 새 이크란을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하고, 이마에 뿔이 솟은 괴물에게 쫓기기도 하고, 에이와 나무 홀씨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검은 안경은 마법을 일으키는 신령스런 물건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답답하다고 안경을 벗으면 화면은 다시 2차원으로 돌아가 평평하게 보입니다. 검은 안경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기술도 다른 여느 영화와는 다르겠지요. 다른 영화를 보게 되면 그런 효과가 나지 않는 걸 보면요. 영화와 안경 사이의 조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아바타>는 여러모로 참 신기한 영화입니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검은 안경이 끼어들면서 3D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는데, 그런데 내적으로도 다양한 안경이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기독교의 안경을 낀 이에게는 자연숭배를 부추기는 몹쓸 영화로, 불교렌즈를 갖고 있는 이에게는 화엄사상을 설명한 불교영화로, 보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영화로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각자가 갖고 있는 안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신자로서 불교인의 렌즈를 낀 난 당연히 이 영화를 불교영화로 봤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한 첫마디가 ‘완전 불교영화다’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이 영화를 불교영화로 보는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아바타>라는 제목부터가 불교적입니다. ‘아바타’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화신불’을 의미합니다. 화신불(化身佛)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부처님의 몸입니다. 응신불(應身佛)이라고도 합니다. 대표적인 분이 석가모니불입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은 법신불의 아바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는 제이크 라는 남자와 그의 아바타가 등장합니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고 힐체어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제이크는 본체라고 할 수 있고, 판도라 라는 행성에 사는 나비족의 모습을 한 생명체는 제이크 셜리의 아바타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특이하게도 본체가 아닌 아바타의 손을 들어줍니다. 제이크와 아바타의 삶을 오가며 살았던 주인공은 마침내 제이크로서의 삶을 폐기하고 아바타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이런 선택은 영화의 스토리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 없지만 영화가 줄기차게 했던 주장에서는 조금 어긋납니다. 영화 속에서 나비족의 입을 빌어 감독은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게 다 헛것이기에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꿈꾸는 자의 삶이라고.’

이렇게 말해놓고 주인공으로 하여금 아바타의 삶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였습니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 집착하면서 부처님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생겨야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인도의 석가족이었으니 백인이나 흑인 그리고 동북 아시아인들은 부처가 될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는 곧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상황만큼이나 아둔한 행동입니다.

이 영화가 불교영화인 다음 이유는 나비족의 삶을 통해 본 화엄세계에 대한 상징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가장 먼저 한 설법을 엮어놓은 책인데, 그만큼 부처님의 심오한 경지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대한 경전 중의 가장 중심사상은 아마도 ‘일즉일체(一卽一切)일 것입니다. 하나는 세계와 통하고, 세계는 또한 그 하나와 통한다는 뜻으로,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불교 공부가 많이 된 사람에게도 이 사상은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중생의 근기에는 좀 어려운 경전이라고 판단하고 아함경을 다시 설명하였지만 이 경전이 불교 최고의 경전인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심오하고 궁극적인 가르침을 영화는 참으로 쉽게 설명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는 대조적인 두 존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지구인이고 다른 하나는 ‘판도라’라는 행성에 사는 나비족입니다. 영화의 중심 갈등은 지구인의 탐욕에서 비롯됩니다. ‘언옵테이늄’이라는 광물은 나비족이 터전삼아 살고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 다량 매장돼 있는데 이 광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구인이 ‘판도라’행성을 점령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스토리에서도 나타나지만 지구인이 중요시하는 건 물질입니다. 물질의 지배를 받는 지구인은 또한 탐욕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다 갖췄다’는 의미의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변변한 집도 없으며 천 한 장도 걸치지 않았으며 그야말로 야생의 상태로 살아가는 종족입니다. 집은 그들이 터전삼아 살아가는 홈트리에 매달린 그물에서 자고, 뱀이나 개구리 등 파생류처럼 몸에 다양한 무늬가 그려져 있어 옷이 필요 없기에 그냥 벗은 채로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삶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모든 걸 갖춘 갖추었다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완벽해보입니다. 그들에게는 비행기보다 더 자유자재로 하늘을 나는 ‘이크란’이라는 새를 친구로 뒀고, 땅 위를 차보다 빨리 제약 없이 달리는 ‘다이어호스’ 라는 말이 있고, 또 컴퓨터 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는 나무를 이용할 줄 압니다.

이 나무의 존재가 특히 나비족을 불교적으로 보게 합니다. 나비족이 살고 있는 판도라 행성에는 수 천 억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들은 뿌리가 서로 연결 돼 있어서 수많은 정보를 공유합니다. 광케이블로 연결된 수많은 컴퓨터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것처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라는 불교의 화엄사상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비족은 이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감할 뿐입니다. 나의 에너지와 상대방의 에너지를 교감시켜서 한 에너지를 만듦으로써 그걸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굳이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다 가진 자처럼 풍요로운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과 나비족이 다른 이유를 화엄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하나는 전체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나비족은 이 사상을 이해하고, 또한 이 사상대로 살아가는데 반해 인간은 독불장군처럼 개인을 타자화시키고 있습니다. ‘떠도는 섬’처럼 외로운 영혼이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인간의 망상이고 꿈꾸는 거라는 걸 영화는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바타>는 분명 불교영화였습니다. 3D영화라는 최첨단 기술의 영화, 미국이라는 기독교적 배경에서 만든 영화가 불교영화라는 것은, 그만큼 불교가 시대를 앞서가는 종교로, 모든 다양성을 포괄하는 종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김은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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