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체벌 논란이 계속되자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학생권리 보장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체벌금지와 학생인권 보장 등을 법령에 명문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앞으로 찬반논란도 있을 것이고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법령 개정 등의 과정도 있겠지만 그동안 진보성향 교육감과 학생들이 요구해온 사항을 전향적으로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사실 교육에 있어 체벌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에서도 회초리는 필수 교육용품으로 등장하고, 서양 고대철학자 플라톤도 “체벌은 사람을 일깨운다”고 말했듯이 체벌은 교육 효과 증진의 특효약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도 일부사람들은 ‘교실의 황폐화’ ‘교육 포기’ 등의 우려를 제기하며 체벌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체벌만이 능사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체벌은 학생인권을 억압하는 심각한 폭력 수단으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체벌하는 교사는 ‘훈육을 위한 사랑의 매’로 인식한다하더라도 학생은 인격 모독과 모멸감만 느낄 뿐 교사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있다.

상대를 교화함에 있어 불교에서는 섭수(攝授)와 절복(折伏)을 말한다. 《승만경》〈십수장〉을 보면 “제가 힘을 얻는 때에 어느 곳에서든지 (나쁜 일을 하거나 계법을 지키지 않는) 중생들을 보고는 절복해야 할 이들은 절복하고 섭수해야 할 이들은 섭수하겠습니다”는 문구가 있다. 섭수란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이나 행동으로 교화해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하는 방법이다. 반면 절복은 교화가 꼭 필요하다 싶을 때 엄중함과 엄격함으로 상대를 꺾고 굴복시켜 그 근본바탕을 억지로라도 바꾸어 놓는, 강한 교화 방식이다.

모든 것을 받아줄 것 같은 불교에서 교화할 때 절복을 수반한다는 것은 중생교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그 절복은 어디까지나 자비의 절복이고 중생교화의 절복임을 알아야 한다. 이왕이면 섭수로서의 교화가 좋을 것이지만 불가피하게 절복의 수단을 행하는 것은 상대를 굴복시켜서 그 마음을 항복받아 다시 새로운 정신을 접목시키려는 자비의 발현이다.

체벌이 있어야 한다거나 없어야 한다는 일도양단식의 판단은 또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다. 섭수와 절복의 방편이 다 요구되듯이, 그 두 측면을 어떻게 적절히 안배하고 사용해야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또 인격모독이 없고 학생에 대한 자비심이 수반된 최소한의 범위에서만 체벌이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법진 스님/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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