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간 나오토 총리는 8월 10일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여 가까운 시일에 이를 전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당초 간 총리는 의궤  ‘반환’ 의사를 분명히 할 예정이었으나, 일본 내 분위기를 우려해  ‘반환’ 대신  ‘인도’의 의미를 내포한 ‘전달’이라는 말로 반환의사를 표현했다. 

간 총리는 더불어 “과거사 현안에 대해 앞으로도 성실하게 해나가겠다”며 “사할린 한국인 지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봉환 지원이라는 인도적 협력을 앞으로도 성실하게 실시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간 총리는 이날 내각회의를 열어 한일강제병합 100년에 즈음한 총리담화 내용을 확정한 뒤 이 같은 내용을 공식발표했다. 간 총리의 담화문에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1910년 한일강제병합과 식민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조선왕실의궤 등을 ‘반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의 조선왕실 의궤 반환과 관련해 그동안 의궤 환수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온 조계종 중앙신도회의 ‘조선왕실 위궤 환수위원회(공동대표 김의정)’는 즉각 환영의 뜻을 표했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는 10일 오전 서울 견지동 조계종 전법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총리가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를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밝힌 데 대해 “민간단체의 환수 노력이 성과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의정 공동대표는 “2006년 의궤의 환수운동을 시작해 5년여 동안 꾸준히 환수운동을 벌였고, 올해 8월 환수를 목표로 했다”며 “이는 경술국치 100년인 올해 의궤를 돌려받지 못하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대표는 “의궤는 일본 황실의 궁내청 소장이어서 일본사람들도 불가능한 일로 여겼지만 정치적 해결을 넘어서 결국 ‘문화적 마음이 열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환수위 사무처장인 혜문스님은 “조선왕실의궤가 돌아오는 것은 일본 총리 담화의 ‘사죄’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이번 환수를 통해 한일 간에 이해와 우호를 토대로 한 관계를 놓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스님은 또 “앞으로 의궤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소유였으며 현재 궁내청에 소장된 ‘제실도서’와 기타 문화재 등에 대한 환수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환수위는 의궨 반환 결정에 따라 의궤 환국위를 재구성해 의궤 환수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간 총리가 ‘반환’이 아닌 사실상 ‘인도’의 뜻으로 담화를 낸 점에 대해서는 ‘실사구시’의 자세로 이해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송도경 환수위 집행위원은 “반환과 인도의 의미는 분명히 다르지만, 궁내청 소장의 문화재를 제자리에 가져오는 데 정치적 수사 보다는 실질적 인 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혜문 스님도 “정치적인 점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의궤가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어휘의 의미로 인해 취지와 의미가 퇴색되서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스님은 또 “일본 국회의원들과의 만남과 의궤 반환 관련 운동과정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인도’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한국 측이  ‘반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이를 존중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왕실의궤’ 반환은 간 나오토 총리가 “궁내청 쇼로부(書陵部) 소장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를 가까운 시일 안에 ‘반환’하겠다”고 밝혀 향후 반환될 궁내청 쇼로부 소장 한국 전적의 반환 범위와 절차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는 ‘조선왕실의궤’ 외에 궁내청이 보관중인 ‘제실도서(帝室圖書)’ 등도 함께 반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궁내청의 쇼로부는 일본 황실의 족보와 도서, 공문서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곳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때도 이곳 소장 한국 전적 163종 852책을 돌려받은 바 있어, 의궤반환은 ‘역사적 반환’으로 기록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을 당시 이뤄진 문화재 반환 협상 때는 ‘조선왕실의궤’가 궁내청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반환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해외전적조사연구회(회장 천혜봉)가 지난 2001년 발간한 ‘일본 궁내청 쇼로부 한국본 목록’을 통해 궁내청에 조선왕실의궤가 보관중인 사실이 처음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궁내청 쇼로부의 한국 전적은 총 639종 4678책이다. 이 중 1922년 조선총독부가 기증한 조선왕실의궤 76종 154책 등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도장이 찍힌 79종 269책과 대한제국의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이란 장서인이 날인된 제실도서 소장본 38종 375책, 조선 초기부터 왕실에서 소장했던 ‘경연(經筵)’ 인(印)이 찍힌 3종 17책 등이 일본의 불법 반출이 명확한 전적으로, 반환 대상으로 지목돼 왔다.

이후 학계와 시민단체, 종교계 등에서 환수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2006년 조계종 중앙신도회의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주축으로 환수운동이 전개됐다. 이때부터 환수위는 의궤를 돌려받기 위해 일본 등지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운동을 벌였다. 봉선사 혜문 스님과 김원웅 민주당 전 의원 등이 환수 운동에 앞장섰다. 환수운동은 올해 들어 반환 논의가 활발해 졌다. 지난 2월 18대 국회에서 ‘조선왕실의궤 반환 촉구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4월에는 환수위가 최종 소장목록 81종을 확인했다. 목록에는 ‘진봉황귀비의궤’, ‘책봉의궤’ 2권,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 ‘화성성역의궤’ 등이 포함됐다.

진봉황귀비의궤와 책봉의궤는 고종의 후궁인 엄씨를 황귀비와 계비로 책봉하는 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는 순종의 부인인 순명황후의 신주를 무덤에 묻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조선 후기 수원 화성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등을 수록했다.

조선왕실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여러 의례의 전모를 소상하게 기록한 서책이다. 왕실의 혼사, 장례, 부묘, 잔치, 건축, 잔치, 편찬 등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해 유사한 행사가 있을 때 참고토록 했다.

의궤는 대개 1∼4책의 필사본으로 제작됐지만, 8~9책에 달하는 분량이 활자로 인쇄돼 폭넓게 반포된 것도 있다. 각 책의 제목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와 같이 해당 행사를 주관한 임시 관서의 명칭에 ‘의궤’를 붙여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부터 의궤가 제작됐으나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됐다. 현재 전해지는 의궤 중 1601년(선조 34)에 만들어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대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세기까지 시기가 내려올수록 종류도 많아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졌다.

‘의궤’가 작성되는 주요 행사로는 왕비·세자 등의 책봉(冊封)이나 책례(冊禮), 왕실 구성원의 결혼, 선대(先代)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는 추숭(追崇)이나 존호가상(尊號加上) 등의 여러 제례(祭禮)가 있다.

일반적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명령과 보고 또는 관서들 사이에 오고간 문서인 전교(傳敎)·계사(啓辭)·이문(移文)·내관(來關)·감결(甘結)등과 소요 물품의 제작과 조달을 담당한 부속 공작소(工作所) 등의 기록으로 구성됐다.

조선시대 의궤에는 그림이 다수 실려 있다.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도구와 건물은 그림으로 그려 기록했다. 의례의 행렬을 표현한 반차도(班次圖)와 같은 그림은 화려한 천연색으로 실었다. 대체로 5∼8부 정도가 제작됐다. 임금의 열람을 위해 고급재료로 화려하게 만드는 어람용(御覽用) 1부가 포함된다. 나머지는 관련 관서 및 사고에 나눠 보관토록 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이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된 많은 수의 의궤를 약탈, 프랑스로 가져갔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돌려받기 위해 수차례 협상을 진행했다. 2007년 6월 ‘조선왕조의궤’로 UNESCO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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