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수제불(恒隨諸佛)’ 삶으로

 

석주 스님은 보통사람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80여년의 세월을 수행자로 살면서 큰 족적을 한국불교사에 남겼다. 그 분의 업적이 하도 찬란하기에 떠나고 텅 빈 자리가 너무나 크고 넓다. 큰스님의 빈자리에 채워졌던 숱한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일이 남은 사부대중의 몫이리라.

스님의 한평생은 ‘항수제불(恒隨諸佛)’로 요약할 수 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따르라’는 이 말씀을 곱씹고 깊이 새기고 실천하는 일이 후학의 일이 될 것이다. ‘항수제불’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있는 보현보살의 10대원을 스님께서 한마디로 뭉뚱그린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입적 2주기를 맞아 지난해 보문선원(충남 아산)봉안된 석주 스님의 추모비문 전문을 옮겼다. 비문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의 문장으로, 한 고승의 일생이 단아하면서도 실체적인 표현으로 세세하게 그려졌다. 한자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우리말로 옮겨 정리했다.

 

편길화현광도중생 석주당정일대종사사리탑비 명
遍吉化現廣度衆生 昔珠堂正一大宗師舍利塔碑 銘

달마(達磨)는 동토(東土)에 온 적이 없고 혜가(慧可) 또한 달마를 만난 적이 없거늘 이심전심 견성성불(以心傳心 見性成佛)은 무슨 소리며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하여 심여장벽(心如墻壁)이어야 가이입도(可以入道)라 함은 이 또한 무슨 소식(消息)인가.
무언이언(無言而言)하고 불문이문(不聞而聞)하는 화장찰해(華藏刹海)에서야 무정국토(無情國土)와 유정원음(有情圓音)이 설청동시(說聽同時)인지라 청산유수와 앵금연어(鶯昑燕語)가 비로의 설법아님이 없음이로다. 상설편설(相說?說)하는이 무진광명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우의중생을 위하여 석가세존께서 출현하사 무연대비(無緣大悲)의 언설법우(言說法雨)로서 심화개발(心華開發) 하셨으니 일체중생을 화장찰해와 겁외장춘(劫外長春)에 유희(遊戱)케하심이로다.
이 땅에도 광도중생(廣度衆生)의 보현대원(普賢大願)으로 한 송이 연꽃처럼 출생하신 스님이 계셨으니 석주당정일대종사이시다. 스님의 휘는 정일 호는 석주 속성은 강씨 본관은 진주 아버지의 휘는 대업이고 어머니는 유정각 화신녀이시다. 1909년 음력 3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 북후면 옹천리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일문첩기(一聞輒記)의 총명으로 9세 때부터 고향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공자왈 조이불강(釣而不綱)하고 익불사숙(?不射宿)하라. 즉, 낚시질은 하되 그물은 치지 말 것이며 활로 새를 잡되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쏘지 말라는 구절에서 스님은 일체중생이 호생염사(好生厭死)함은 다름이 없거늘 어찌 조강오매(釣綱寤寐)에 차별을 두는가하며 깊은 생각에 빠진다.
인(仁)을 주장하는 공자의 측은지심에 관하여 의문을 품던 중 불교경전인 범망경(梵網經)을 보다가 일체유명자(一切有命者)를 불득고살(不得故殺)하며 부득축살중생구(不得蓄殺衆生具)하라는 계목(戒目)에 이르러 무차평등(無遮平等)하고 무연대비(無緣大悲)한 불교사상에 감동받고 출가하였으니 1923년 서울 선학원(禪學院0의 남천당 광彦스님을 찾아 은사로 정하고 6년간 행자생활 끝에 1928년 부산 범어사에서 스님이 되셨다.
스님의 행자시절 지극한 은사 시봉은 지금도 교단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이후 1945년 3월 15일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혜일율사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10일 부산 범어사에서 대덕법계를 품수하였다.
1933년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 한 후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길을 따라 일의일발( 一衣一鉢)로 참방하였다. 1936년부터 오대산 상원선원, 통도사극락선원, 해인사퇴설선원, 지리산칠불선원, 금강산마하연, 덕숭산수덕사, 묘향산보현사, 구월산구엽사, 가야산수도암등 제방선원에서 사래밀지(四來密旨)를 참구하시어 내외명철한 경지를 증득하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교단이 질곡에 처하였으니 스님은 포단(蒲團)위에 앉아 있을 수만 없었다. 그로부터 스님의 손길을 구하는 중생의 청을 거절함이 없었으니 자비행화를 열반의 그날까지 일관하여 사부대중이 교단의 자부로 흠모하여 길이 잊지 못하게 되었다.
1940년 부산 온천동 금정선원장에 취임한 이후 곧바로 그해 6월 민족불교 진흥을 위해 경봉, 용담, 대의, 석기스님 등과 함께 불교혁신연맹을 조직하여 왜색불교혁신운동에 앞장서신 이후 종단정화가 성취되는 그날까지 쉬지 않았다. 1951년 3월 김해 은하사주지에 취임하였고 1953년 10월에는 경봉, 동산, 금오, 청담, 자운 스님등과 함께 선학원에서 한국불교교단정하운동을 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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