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초기에 나는 공주에 있었다. 유생 신난수와 장덕개 등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연기현에 속명을 정만억이라 하는 중이 있는데 적을 잘 치므로 사람들이 승장군이라 불러 명성이 자자합니다.” 하였다. 목사 허욱 또한, “이 고을의 중 영규가 자진해서 모집에 응하며 말하기를, ‘만억은 매우 못난 사람이나 그 또한 장군이란 이름을 얻었으니 나도 종군하리라.’ 하고, 뜻을 같이 하는 중 9명을 데리고 적의 형세를 탐지해서 도움을 주고 있으니, 그 말을 들을 만합니다.” 하여, 곧 영규를 불러 보았더니 매우 기골이 장대하고 튼튼하기는 하나 별다른 지혜나 꾀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녹록해 보이지는 않아서 한 모퉁이를 방어케 할 만 하였다.
시험 삼아 그가 탐지했다는 적의 형세를 물었으나 별로 공을 세울 만한 것은 없었다. 내가, “만일 승군 몇 명을 주면 네가 이들을 거느리고 적을 칠 수 있겠느냐?” 했더니 그는 즐거이 승낙하였다. 이에 내포의 승군 수천 명을 뽑아서 거느리게 하고 승병의 패두라고 불렀다. 그는 열흘 동안 승근의 대오를 정리한 후 청주 안심사에 나가 진을 쳤으니 이 절은 고을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이다. 그는 방어사 이옥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다.
이옥은 당시 연기현 동쪽 나루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영규가 서문 밖 빙고현에 진을 치니 모두 세 진이었다. 때때로 정예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적을 맞아 싸우니 적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때는 임진년 7월 보름과 스무날 사이였다.
이달 29일에 방어사와 이웃 고을 수령들이 영규와 함께 청주의 적을 치는데 내가 모든 것을 통제했다. 종일토록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자 이옥과 영규가 군사를 거두었다. 나는 공주목사를 시켜 이옥의 진에 가서 경솔히 철수한 것을 책하고 곧 다시 싸우도록 독려하라고 했다.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 적의 머리를 베지는 못했어도 화살과 총탄으로 많은 적들을 다치게 해 그 형세를 매우 고립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튿날 새벽에 적들은 무리지어 모두 도망갔다. 이 뒤로는 적들이 다시 와서 침범하지 않으니 청주 경내가 편안하여 백성들이 곡식을 수확할 수가 있었다. 이 일로 영규는 안팎으로 소문이 났다.
8월 10일에 전라도 순찰사가 금산에 있는 적을 쳐서 이기지 못하자 영규를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다. 내가 이를 승낙하자 영규는 그 군사를 거느리고 유성이라는 곳에 나가서 진을 쳤다. 제독 조헌은 일찍이 이 달 1일의 전투 당시 영규의 진으로 가서 군사 수백 명으로 싸움을 도운 적이 있었다. 이 때 영규가 쓸 만한 사람임을 알고 유성으로 따라가서 진영을 합친 후 그를 독려하여 함께 금산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영규가 말하기를, “전라도 순찰사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진격하려 하면서 나에게 선봉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경솔히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조헌에게 순찰사와 날짜를 약속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통보가 오기 전에 조헌은 적을 속히 쳐야 한다고 강경히 고집하면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금산으로 들어가니, 영규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부하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패할 것이 분명하니 가지 마소서.” 했으나, 영규는 말하기를, “가부를 서로 의논하여 확정지을 적에는 오히려 그의 말을 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 사람이 이미 먼저 갔으니, 내가 만일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가 구원하겠느냐?” 하고는 따랐다. 이때는 8월 17일이었다.
영규가 조헌과 금산 5리 안에서 진을 함께 치고 있노라니 적이 크게 몰려와 조의 진이 먼저 함락되고 영규의 진이 다음으로 함몰되었다. 이 싸움에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10명 중에 8, 9명이나 되었고, 적도 죽은 자가 많았다. 조헌이 만일 영규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 같은 패패가 있었겠는가? 원통하고 원통한 일이다.
그 이튿날 조헌의 군관이 순찰사의 문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였다. 약속한 날짜를 적은 글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끝났으니 이제 말해 무엇 하겠는가? 청주의 적을 몰아냈다는 보고가 의주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영규에게 정 3품의 벼슬을 내려주고 비단옷까지 보냈으나 영규는 이미 죽어서 받지 못했다. 이 뒤로 승병들이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으니 실로 영규가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영규는 청주에서 적을 칠 때에 수령들이 혹 물러서면 짚고 있던 큰 몽둥이로 등을 치면서 말하기를, “평상시에는 고기를 먹으며 잘 지내더니 이제 와서는 도망할 생각밖에 없느냐?” 하니 수령들이 감히 뒷걸음질 치지 못했다. 진영에 혹시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군법으로 다스리니 사람들이 그의 말을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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