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은 아름다우니까 가시가 돋고, 가시가 돋으니 아름다운 것이다. 한 개체 전부가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개체가 아닌 딴 개체로 더러움이 있게 된 소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전체성으로 보아 차별의 상대가 있는 까닭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아름다운 개체와 미운 개체를 초월하여 전체적 발전을 꾀하는 여래(如來)의 심정을 목표하고, 여래의 작용을 표준으로 자안(自安)하고 노력할 것이다.
즐거움이 있는 곳에는 괴로움이 있고, 보리(菩提)가 있는 곳에 번뇌가 있고, 생사가 있는 곳에 열반이 있다. 두 몸이 한 몸이다. 일물의 양면이다. 둘이라는 관념은 자타 전체의 발전성을 모르는 편견이요, 연기성적 감사의 관념을 망각하는 자는 자타 함께 무량광수(無量光壽)의 발견을 못하는 즉 여래의 심정을 몰라 자신의 단명을 촉진하는 가련한 자가 될 것이다. 선도 법이요, 악도 법이다.
오늘날 악이 공간상으로 간접적, 시간상으로 후기에 선을 도와주는 악이라 할진대, 오늘날 악이 반드시 악될 것이 없다. 현실에서 분명코 악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앞을 내다보아 그것이 악이 아니다. 선도 또한 그렇다. 그런고로, 전체성으로 보아 현실의 선악이 반드시 바른 의미의 선악이 아니다. 악은 깨친 안목으로 보아 알 일이다. 보리(菩提)가 있는 곳에 번뇌가 있고, 생사가 있는 곳에 열반이 있다.
제법(諸法)은 본래 공한지라 선악의 근본은 있을 리 없다. 억지로 표준을 정하여 전체성과 영원성에 구할 수 밖에 없다. 전체성은 광(光)이요, 영원성은 수(壽)다. 광과 수를 ‘아미타’라고 한다. 무량한 광수(光壽)가 아미타불이 안 될 수 없다. 부처님 경계에 이르지 못하면, 다시 말하면, 각(覺)하지 못하면, 삼천대천세계, 즉 한량없는 우주 공간을 다 내다볼 수 없고, 겁전 겁후(劫前劫後)의 한량없는 시간을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지(智)에 있어 깨치기 어려운 우리들 생류(生類)라는 점에 있어 버리기 어려운 번뇌를 또한 어떻게 할까. 그러나 겁을 두고라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어렵다는 말과 불가능이라는 말이 다르니, 자성(自性)을 깨칠 신념은 이론보다도 실증인 불타로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닌가. 믿고 공부하지 아니할 수 없다.

편집실 | iseonwon@iseonwon.com

추담(1898~1978) 선사는 40세에 삼각산 약사사(현 봉국사) 회명선사를 은사로 재입산 추담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일본 대정대학에서 수학했다. 설봉산 귀주사에 수도생활을 했으며, 능인학원을 창설하고 함흥 일능사립학교를 인수 교장에 취임하여 아동교육에 전념했다. 건봉사 대교과 이수 후 만해 한용운 선사와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중 충남 부여에서 투옥되는 등 교편생활을 하며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불교정화추진위원회 50인의 한사람으로 정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총무원 초대 교무부장, 불교신문 초대 주간, 금산사 법주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1978년 11월26일 소요산 자재암에서 세수81세 법랍42년으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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