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에 대한 정의는 ‘지나치게’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선객들의 말처럼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게 또한 선(禪)”이다. 그래서 선객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은 사실상 객관적으로 없다. 어떤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형식이나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깨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인가(認可)를 중시 여긴다.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 즉 화두를 타파했는지를 검증 받는 것이다. 혼자서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의 방식을 ‘법거량’이라 한다. 법거량의 질문은 어떤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답이 막혀서도 안 된다. 화두를 타파했다면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답 또한 정확하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이는 대현 스님(보광선원장·사진)이 출가 후 걸었던 길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일 스님, 전강 스님, 경봉 스님, 향곡 스님 등 걸출한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현 스님은 스스로 “인가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깨침이 최상승의 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위해 제방의 큰 스님을 좇으며 끊임 없이 노력(법거량)하는 수행자도 오늘의 불교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냐”고 덧붙였다.
대현 스님은 1968년 22살 되던 해 가을 장성 백양사에 입산했다. 그러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 채 여려 해 동안 각화사, 칠불사, 용화사 등에서 머물다가 1972년 봄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서 정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득도(得度)하고, 고려 8국사와 조선 8대사를 배출한 남도의 명찰 백련사를 출가본산으로 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백련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헐벗은 전각과 요사만이 있던 시골 산사였지만, 대중들의 수행가풍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활발발했죠. 10여명 남짓한 선객들은 산철에도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았고, 정일 스님 역시 수행과 울력을 그들과 함께 하며 올곧은 수행자의 상을 세웠습니다. 나는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부의 도리를 하나 둘 배워나갔습니다.”
그 후 대현 스님은 지리산 칠불사 운상선원, 강원도 정선 정암사 적조암을 거쳐 혜암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각화사 동암(일명 ‘금봉암’)을 찾아가 방부를 올렸다.
“동암에서의 수행을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자정(0시)에 일어나 새벽 3시까지 정진하고 도량석이며 아침예불에 참석하고 이내 공양간으로 달려갔습니다. 겨울 새벽밥을 짓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지만, 신심으로 이겨내며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 고달픔이 운상선원 시절을 떠올리게 했죠.”
대현 스님에게 운상선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실참수행’의 초입에 들어서는 계기를 맞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님은 행자로서 머물고 있었고,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한 스님이 ‘주력 보다는 ‘무(無)’자 화두로 참구할 것‘을 권유했고, 대현 스님은 구참 스님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리고 전강 스님, 향곡 스님, 경봉 스님 등 걸출한 선지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는 선승(禪僧)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친견했던 선지식들에게는 한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회상(會上)이건 스승은 말과 행동으로 제자들의 신심과 분발심을 자극해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도록 했습니다. 법담의 길도 활짝 열어놓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그들은 제자(선객)들에게 울력을 시켰지만, 그것은 가람을 수호하는 일이 아니라 ‘동중(動中)공부’의 길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스님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게 있다. 이 속담의 뜻은 스승도 없이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다고 해서 스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좋은 스승을 청하고, 그 스승이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설해주어야 온전한 스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불교만큼 사제(師弟)의 가풍이 분명한 곳은 드물다. 대현 스님은 그 가풍에 따르며,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중에도 화두를 잠시도 놓지 않고 정진했고, 또 점검받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화두 참선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활구 참선이고 또 하나는 사구(死句) 참선입니다. 사구 참선은 무엇이냐. 참선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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