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8일 범어사(梵魚寺) 보제루. 석주당(昔珠堂) 정일(正一) 대종사의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1923년 출가 이후 81년 동안의 수행자로서의 삶을 마친 것이다.  선학원 이사장, 조계종 총무원장, 동국역경진흥원 이사장, 조계종 개혁회의 의장 등 번다한 상(相) 역시 한줌 재와 연기로 사라졌다. 젊은 시절 선학원에서 스님과 함께 수행했던 관응 큰스님은 석주스님을 항상 다정다감했던 자비보살(慈悲菩薩)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廻顧九十六年事  회고구십육년사 
一似懷珠傭作擔  일사회주용작담 
貧今朝放下煩重  빈금조방하번중 
本地風光古如今  본지풍광고여금 
96년의 세월을 되돌아보니
마치 왕자가 구걸 다니듯 했네
오늘 아침 무거운 짐 내던지니
옛 모습 오롯이 본 고향이구나

인용문은 스님이 2004년 11월 11일 봉은사 종루(鐘樓) 주련으로 쓰고자 남긴 글이다. 열반송은 아니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삶과 수행에 대해 읊은 마지막 게송이다.
스님은 1909년 경북 안동 북후면 옹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그런데 집안의 9촌 아저씨가 문중사람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 가회동에 집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스님과 선학원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스님은 14세 때 서울에 와서 그 집에서 1년 정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형편이 어렵게 되어 모두 흩어지고 스님은 당시 필방(筆房)을 하던 아저씨의 도움으로 선학원에 가게 되었다. 훗날 스님의 스승이 되시는 남전(南泉)스님이 필방에 자주 오신 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남전스님은 도봉․석두․성월스님 등과 함께 선학원을 창설한 분이다. 1920년대 당시 서울에 있었던 석왕사 포교당의 도봉스님이 남전스님과 친했다고 한다. 남전스님은 범어사 포교당인 임제종 포교당에서 포교사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 김석두스님, 오성월스님과 함께 선학원 창립의 산파역을 담당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켜나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회고하였다.
남전스님은 제자 석주스님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법명도 ‘정일(正一)’이라고 지어주셨다. 생전의 스님은 “지금도 남전스님 문하에서 공부하던 초심자시절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하였다. 제자를 끊임없이 혹독하게 채찍질했던 스승은 정직하게 살면 승적(僧籍)도 필요 없다고 가르쳤고, 제자는 그 가르침을 평생 가슴속에 안고 살다 갔다.

스님은 출가를 선학원에서 했는가라는 질문에 “출가는 아니고 그대로 선학원에 있으면서 일을 하고 있었지”라고 술회하였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웠던 일제치하에서 선학원과의 인연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스님의 성품과 함께 위로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밑으로는 중생을 제도하라는 출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이 방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지. 각 종교에서 여름에 한 번씩 공동강연회를 개최했는데 한용운스님이 제일 인기를 끌었지. 마치면 에수교 사람들은 처음부터 질문하지 말라 하고 질문을 안 받았어. 그런데 한용운스님은 질문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라들이 매달리고 난리가 났지. 그러니까 사회자가 나와서 미안하지만 개인적으로 질문하라고 떼놓고 그랬지. 아주 웅변가야.”

선학원 시절 만해 한용운스님에 대한 스님의 회고다. 만해스님은 당시 주로 백담사에 계셨는데 서울에 올라오시면 항상 선학원에서 묵으셨다고 한다. 만해스님이 쓴 『불교대전』이나 간행한 『유심(唯心)』지는 당시 포교자료로 큰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스님은 한국근현대불교사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분이자 산 증인이다.
스님은 20세 때까지 선학원에 있었는데 세상이 싫고 힘든 일이 많아서 그만 떠나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한번은 예불을 마치고 큰방에서 자다가 스승인 남전스님이 게으르다고 야단치고 가라고 하셨다. 이때 스님은 선학원과 인연이 깊은 범어사로 갔다. 범어사에서 스님은 이산(梨山)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를 받고, 일봉(一鳳)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1933년 스님은 범어사 강원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한 후 전국의 주요 선방(禪房)에서 화두를 들었다. 금강산 마하연, 묘향산 보현사, 오대산 상원사에서의 수행은 스님의 행자시절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었다.
스님은 1936년 경성에서 회령까지는 철도를 이용하였고, 그 후부터 걸어서 비로봉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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