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를 찌르는 다석 사상의 정수!
육성으로 듣는 동서 회통의 종교사상

2008년 7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류영모는 우리 말과 글로 철학을 했던 최초의 사상가이자, 기독교를 큰 줄기로 삼아 유교, 불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통달하여 마침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우리나라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말한 다석의 종교 사상은 21세기 들어와 종교 간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상생을 가능하게 해줄 희망과 대안의 사상으로서 세계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류영모가 여든한 살 때인 1971년 8월 12일부터 일 주일간 전남 광주에 있는 자생적 금욕 수도 공동체 ‘동광원’에서 수녀와 수사들에게 한 강의의 녹음 테이프를 글로 옮기고 류영모의 직제자 박영호가 풀이한 것이다. 일평생 삶과 죽음을 궁구하며 진리를 좇은 대사상가가 들려주는 폐부를 찌르는 간결하고 명료한 진언 속에서 다석 사상의 핵심을 만날 수 있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어 낸 제소리!
이 강의에서 류영모는 《맹자》와 《중용》, 《주역》, 구약과 신약 성경, 불경을 두루 아우르며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일원다교(一元多敎)의 사상을 펼친다. 또한 류영모는 예수와 석가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본받을 스승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도 하느님을 신앙한 이들이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와 석가처럼 하느님을 신앙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예수와 석가의 하느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예수와 석가처럼 큰 깨달음에 이른 몇 사람만이 냈던 독창적인 ‘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다석 강의 녹음 테이프 가운데 음질 상태가 좋은 5개의 강의를 골라 MP3 CD로 만들어 책에 첨부하였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로 진리를 말하는 류영모의 맑고 굳센 목소리가 시종일관 청중을 압도한다.

다석 류영모의 마지막 강의, 40년 만에 빛을 보다!
다석 류영모는 독특한 종교 철학을 세운 사상가이자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과 철학에 달통한 석학이었지만 매일 기록한 《다석일지》 외에 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현재 다석과 관련된 책들은 다석이 직접 구술하거나 쓴 것이 아니라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려는 제자들의 기록이거나 다석 사상 해설서가 전부이다. 그나마 다석이 1956~1957년에 걸쳐 서울 YMCA에서 행한 연경반 강의의 속기록 전문을 다듬어 출간한 《다석강의》가 다석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석 마지막 강의》에서 다석 류영모 자신이 직접 들려주는 다석 사상의 정수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81세의 나이로 죽음을 앞둔 다석 류영모가 ‘동광원’이라는 금욕 수도 공동체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중 강연의 녹음 테이프를 녹취해 풀어 쓴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는 그 발견 자체가 일대 사건이다. 애초에 동광원에서 이루어진 고별 강의를 서울 쪽의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다석의 강의를 동광원의 수사 김용래가 녹음했다는 사실이 20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류영모의 말씀을 가장 먼저 녹음한 곳은 KBS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59년 12월 8일에 13분 동안 요가 운동에 관해 녹음을 했는데, KBS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녹음 테이프는 보관되어 있었으나 음질이 훼손되어 들을 수 없다. 그밖에 몇 사람이 다석의 강의를 녹음하였으나 분실되었다. 결국 동광원 녹음 테이프는 류영모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자료로서 대단히 가치가 높다. 가공되기 전 원석과 같은 《다석 마지막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책이 될 것이다.

동광원 강의 녹음 테이프의 진정한 가치는 다석 류영모의 가르침을 다른 이의 손과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마지막 고별 강의에서 류영모는 일체의 군소리를 떨어버리고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게 진리를 이야기하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상가, 영성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굽이를 지나거나 곁길로 나가지 않고 오로지 앞을 향해 시원하게 뚫린 큰길로 성큼성큼 걸어가 곧장 핵심으로 들어가는 다석의 육성 강의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직접 뵐 수 없는 목마름을 풀어줄 해갈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류영모/교양인/22,000원

◎ 류영모는 누구인가?
앎과 삶이 하나였던 참사람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8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

◎풀이, 박영호(1934~ ) 는?

1934년에 태어난 박영호는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가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박영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잃어버린 예수 -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도서출판 교양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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