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稀有世尊 佛說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如是之經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則生實相 當知是人 成就第一稀有功德 世尊 是實相者則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則爲第一稀有 何以故 此人無我相無人相衆生相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衆生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則名諸佛 佛告須菩提 如是如是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不怖不畏 當知是人 甚爲稀有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의 설법을 듣고 깊이 그 뜻[義趣]을 알아차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 그리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와 같이 대단히 심오한 경전을 제가 옛적부터 얻은 혜안으로도 아직껏 이와 같은 경전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신심이 청정해져 곧 실상을 낸다면 마땅히 그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실상이란 곧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설하여 실상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들은 이 경전을 신해하고 수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래세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듣고서 신해하고 수지한다면 그 사람은 곧 제일의 희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고 중생상이 없고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진상이 아니고,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의면 곧 제불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다. 바로 그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희유한 사람인 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는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닌데 그것을 제일바라밀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에 대해서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는데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잘리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사지가 갈가리 찢기웠을 때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다면 마땅히 진한을 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생각해 보면 과거 오백 세 동안 인욕선인으로 있으면서 그 오백 세 동안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야 한다. 마땅히 색에 집착이 없이 마음을 내고 마땅히 성·향·미·촉·법에 집착이 없이 마음을 내어 집착없는 마음을 내야 한다.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다면 곧 그것은 올바른 住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보살에게 마땅히 마음을 색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라고 설한다.

수보리는 신명을 버려서 얻은 복덕이 수지연설하는 수승함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설법을 듣고서 불은(佛恩)에 깊이 감복하여 마침내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면서 희유하시다고 찬탄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수보리 자신도 옛적 이래로 이 금강경전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전을 듣는다면 마음이 청정해져 실상을 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선현 자신은 지금 직접 부처님의 호념으로 인하여 이 금강경전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미래의 중생들이 이 가르침을 듣는 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희유하다는 것은 이 금강경전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아·인·중생·수자의 사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비상(非相)이다. 비상이란 곧 실상이다. 이와 같이 제상을 여읜 것이 곧 정각을 성취하는 것이다. 때문에 곧 제불이라 말한다.

‘그와 같다.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은 그와 똑같다는 말이다. 대승법은 본래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승의 근기가 아니면서 이 대승법을 들으면 경악하고 의심과 두려움과 무서움과 공포를 낸다. 그러므로 이 대승법문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실로 희유한 일이다. 이 희유한 대승법문은 최고[無與等]의 것이다. 때문에 ‘제일’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법은 본래 설한 바가 없다. 때문에 그 법에 집착할까 염려하여 ‘제일바라밀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연이 있으므로 또한 설할 수가 있다. 때문에 ‘제일바라밀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수보리가 지혜의 눈을 얻은 이래로 그때까지 이 금강경문을 들어보지 못한 까닭은 법을 받아들이는 근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록 수보리가 소승의 지안(智眼)은 얻었을지라도 아직 대승법은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이제 마음을 돌이켜 대승법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희유하다고 말한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라는 것은 이 지혜의 법문이 견실하고 심묘하여 다른 사람들이 분별할 수 있는 바라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은 곧 비상이다.’ 라는 것은 이 신심은 청정하여 무상(無相)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실상 실상’이라는 것은 무상의 실을 말한다.

‘그 사람에게는 아상이 없고 ….’ 등은 소취(所取)의 경계가 전도상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한 ‘아상은 곧 相이 아니다.’ 라는 것은 능취(能取)의 경계가 전도상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이 실상의 예와 아상 등의 예 두 가지 상(相)은 아공과 법공으로서 무아지(無我智)이기 때문이다.

‘놀라지 않고’ 라는 것은 비처(非處)에 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라는 것은 의심을 끊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며, ‘무서워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절대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신명을 바치는 고통만으로도 이미 남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런데도 하물며 법문을 듣는 것일지라도 경전을 수지하고 연설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논》에서는 ‘저 몸의 괴로움을 염(念)하면서 혜명수보리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슬프게 울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혜안’은 아공이고, ‘미문’은 법공이다. 《논》에서는 ‘이 가운데에는 실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실상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자취에 대해서는 ‘세존이시여, 그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닙니다.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 실상이라 이름하십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무착은 ‘실상속에서 실상의 분별을 여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상(四相)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무착은 “경문에서 말한 ‘그 사람은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은 인취(人取)가 없음을 현시한다. 그리고 ‘아상은 곧 아상이 아니다.’는 것은 법취(法取)가 없음을 현시한다. 그리고 경문에서 말한 ‘왜냐하면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읜 것이 제불이기 때문입니다.’는 것은 제보살이 학상(學相)을 수순하는 것과 제불세존이 일체상을 여읜 것을 현시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도 응당 그와 같이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논》에서는 ‘놀란다[驚]는 것은 곧 일찍이 아직껏 자기가 체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저어함[懼]이 생기기 때문에 놀란다[驚]고 이름한다. 이처럼 놀라는 것은 책망받을 만하기 때문이고, 正道의 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워한다[怖]는 것은 마음[心體]의 공포이다. 마음에 공포가 일어나 의심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서워한다[畏]는 것은 항상 남에게서 비방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이 필경에는 경(驚)과 포(怖)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곳을 멀리 여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문승 가운데에는 세존이 어떤 法과 어떤 공을 설하자 그 경전을 듣고는 아직까지 그와 같은 법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자빠진다[驚]. 그리고 공을 설하자 그와 같은 공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怖]. 그리고 사량할 때에 법과 공의 두 가지가 그들의 깜냥으로는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고 상응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서워한다[畏]. 다시 별석하면 3종의 무자성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상무자성(相無自性)과 생무자성(生無自性)과 제일의무자성(第一義無自性) 등이다.

일반적으로 경문에 대한 이해 얻으면 진실로 기뻐해야 할텐데 수보리가 슬프게 우는 이유에 대하여 영해(領解)하는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는 해(解)를 얻고 환희하는 경우인데 《법화경》에서 신자(身者)가 용약환희(踊躍歡喜)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해(解)를 얻고 슬피 우는 경우인데 이 경문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셋째는 환희하기도 하고 슬피 울기도 하는 경우인데 선집왕(善集王)이 희비를 교대로 느끼는 경우이다. 환희하는 것은 지금 깨닫는 것을 환희하는 것이고, 슬퍼하는 것은 옛날에 미혹했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듣고 있는’ 이하는 수보리 자신의 경우는 영해가 쉽다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다. 쉽다고 하는 까닭은 첫째는 과거에 오랫동안 삼다(三多)를 심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현재의 제불을 친견하여 것이다. 이처럼 내인(內因)과 외연(外緣)을 구족하기 때문에 신수(信受)가 쉬운 것이다. 그리고 적문(跡門)의 입장에서 논하자면 수보리는 곧 대아라한이다. 그래서 《대품반야경》에서는 반야는 심심한데 누가 신해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정견을 성취한 사람으로서 누진아라한이 믿는다고 말한다.

‘만약 진실로 당래세에’ 이하는 수보리 이외의 다른 사람의 경우에 영해가 어려움을 진술한 것이다. 어려운 까닭은 진실로 말세에 있어서 후오백세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전오백세는 깨달음[道]를 얻는 자가 많고, 깨달음[道]를 얻지 못하는 자는 적다. 후오백세(後五百歲)는 깨달음[道]를 얻지 못하는 자가 적고, 깨달음[道]를 얻는 자는 적다. 전오백세는 무생을 믿는 자가 많고, 불신(不信)자는 적다. 후오백세는 믿지 않은 자가 많고, 믿는 자는 적다. 이로써 전오백세를 정법이라 이름하고, 후오백세를 상법이라 말한다. 상법 시대에는 믿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때에 중생이 오랫동안 삼다(三多)를 심지 않고, 오랫동안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하며, 내인(內因)의 외연(外緣)이 없는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제일바라밀을 설하여 ….’에 ‘제일이 아니다.’는 것은 진제에서는 제일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제일이라 이름한다.’ 는 것은 세제에서는 가명으로 제일이라 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일바라밀이 아니다.’ 라는 것은 다른 수다라는 제일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것을 제일이라 말한다.’는 것은 이 경전이 제일임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여의면 곧 제불이라 말하기 때문입니다.’는 대목은 결론짓는 부분이다. 만약 분별이 있으면 없이 있어 생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미 분별상과 망상을 제거하고나면 생사가 모두 없는데 그것을 제불이라 말한다. 금강경 전체의 경문에는 부처님에 대한 정의가 세 차례 언급된다. 첫째는 본 ‘이일체제상즉명제불(離一切諸相則名諸佛)’의 대목이고, 둘째는 제13단의의 ‘여래자즉제법여의(如來者卽諸法如義)’의 대목이며, 셋째는 제24단의의 ‘여래자무소지거무소종래고명여래如來者無所至去無所從來故名如來)’의 대목이다.

‘제일바라밀 ….’에 대하여 세친의 해석에 의하면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이란 말하자면 시방제불이 똑같이 찬탄하여 설한 것이 대인(大因)이 되므로 제일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경전이 여타의 경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다.’는 것은 말하자면 다른 사람이 얻은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분별지로만 무아의 이치를 증득할 수 있다. 오직 시방의 제불만 가능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제일바라밀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얻는 것을 말한다.

김호귀/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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