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제자로 한평생, 감사한 마음”

 

하안거(夏安居) 결제가 시작되었다. 교계언론에는 간혹 수행하는 스님들의 안행(雁行)하는 모습을 통해 치열한 수행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이번 한 철에는 어느 장부가 부처의 골수를 훔쳐낼 수 있을까.
스님들의 일상사이자 장부일대사이기도 한 수행을 거론할 때면 무불(無佛, 1907~1984·사진) 스님이 떠오른다. 법명이 크다. 부처가 없단다. 아마도 눈 밝은 스승이 스님의 수행과 성품을 놓치지 않고 지어냈을 것이다. 예부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불 스님은 1907년 9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남점룡(南點龍)이다. 스님은 출가하기 직전까지 천주교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고 한다. 삶이 부처님과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어서 스님의 출가는 이채롭다.
스님은 나이 14세 때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에서 월암(月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출가 당시 법명은 성관(性觀)이었지만, 금강산에서 법사로 모셨던 대륜(大輪) 스님은 무불이라고 하였다. 깨달음에 대한 집착도, 깨달음 그 자체도 없는 경지가 아닌가. 스승은 제자의 그릇의 크기를 본 것이다.
스님은 동학사에서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에서 사집과(四集科)를 마치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설호(雪湖)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아울러 서울 개운사에서는 한영(漢永)스님으로부터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스님은 복 받은 분이다. 한 사람도 아닌 세분이나 되는 당대의 강백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니 말이다. 스님은 눈 밝은 스승을 두었던 까닭에 그 배움이 순일했으며, 배운 대로 행했고, 수행자체가 법문이었다. 또한 복 받을 만큼 행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았다.
스님은 촛불 켜는 것조차 여의치 못했던 당시에 달빛과 별빛에 의지해 경전의 내용을 새겨 나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불타는 구도열과 좋은 스승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원하는 시절인연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법이 없다. 사내가 이루어 내야 할 일에 목숨을 바치는 일은 엄숙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것이다. 상상해보라. 달빛에 경전의 글귀를 한자 한자 새기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무릎을 치는 장부의 모습을….
대교과까지 마친 스님은 동학사와 유점사·개운사에서 강사(講師)소임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수행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흔히들 선교겸수(禪敎兼修)라고 하지 않았던가. 교학을 습득한 스님은 타고 온 뗏목을 버린다. 제방의 선원으로 향하는 또 다른 뗏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석(講席)을 박차고 격외(格外)의 선문(禪門)을 두드린 것이다. 청담스님과는 금강산에서 용맹정진을 같이 한 인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선교학(禪敎學)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는 후학뿐만 아니라 참선을 알고자 한 속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화두와 수행을 잘못 거론하면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지만, 스님이 핵심을 놓치는 법은 없었다. 스님의 경전이해를 근간으로 한 자세하고도 정확한 설명이 덧붙여진 참선법문으로 참선의 진리를 쉽고 간결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은사 스님 그동안 사시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습니까.” “느그들 어릴 적에 음식 멕이고, 느그들 키울 때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스승의 한 마디 말에 제자 지허 스님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스승인가 싶을 정도로 혹독했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마음 따뜻하고 인자한 은사의 속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행한 후학교육은 현대 교육의 기준으로 보면 학대이자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제자들이 전날 배운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회초리로 맞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예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아울러 수행자로서 신도집을 방문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기도 하였다. 제자가 이를 어길 때면 눈물이 쏙 나올 정도가 아니라 환속하고 싶을 정도로 혼을 냈다. 승속을 막론하고 수행처가 아닌 곳이 없지만, 한 순간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제자를 배려한 것이다.
스님은 시은(施恩)에 대해서 강조하고 경책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행자가 수행을 게을리 하면 시주물은 부처님과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탐욕을 키우는 수단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의 염원은 겉돌기 마련이다.
스님의 이와 같은 후학에 대한 훈육은 엄격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밤이 되어 모두 잠들면 혼자 몰래 일어나 제자의 헤진 양말을 기워 놓곤 하였다. 자식을 염려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읽혀진다. 1940년대 초에는 일제의 징병을 피해 산사로 찾아 온 젊은이들을 숨겨주고 중간연락을 맡았다가 발각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무불 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광덕(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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