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과 실천으로 마음을 맑게

 

사람들은 스님의 상에 일정한 유형이 둔다. 대부분 도심과는 떨어진 곳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보광 스님(보각선원장·인천·사진)은 그런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주석하는 곳이 학교·교회와 어깨를 맞댄 도심이고, 온화한 미소와 푸근한 어투는 만나는 불자들에게 근엄함보다는 친근감을 준다.

“불교는 인간 저마다의 자유의지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무한한 자유와 함께 무한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확인하는 자각[수행]과 실천[신행]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대두하게 됩니다.”
사실 불교에 있어서 수행과 신행에 관한 논의는 언제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있다. 많은 고승들이 수행과 신행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설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저마다 ‘공의 체득’이라든가, ‘연기를 철견’ 한다든가 ‘업장의 소멸’ 한다고 하는 현란한 언설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은 법기(法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담느냐에 있습니다. 그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따릅니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각[수행]과 실천[신행]이란 좋은 것을 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는 출·재가 모두에게 해당되며, 그 과정의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설사 얻지 못하더라도 내생에서 공부의 바탕이 됩니다.”
『능엄경』에서는 ‘쉬는 것이 곧 깨달음(歇卽菩提)’이라고 했다. 아주 쉽다. 어째서 쉬는 것이 곧 깨달음일까? 또 쉰다는 것은 무엇을 쉰다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쉬어야 하는 것인가?
연야달다의 비유는 이를 쉽게 설명해준다. 연야달다는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자기 머리에 얼굴과 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밖으로 뛰어 달아난다. 얼굴과 눈을 찾아서…. 하지만 본래 면목은 그대로 거기 있다. 다만 미친 증세만 쉰다면, 밖으로 찾아 나설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쉬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님 역시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며 마음에 좋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보살행의 고삐를 꽉 잡고 있을 때 즉, 자각과 실천에 게을리 하지 않을 때 공부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두 허공 가운데 헛꽃과 같습니다. 허공 중에 헛꽃은 본래 없습니다. 눈이 피로해서 있는 듯 보일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 닦는 일에 충실하다고 했습니다. 깨끗한 마음에서는 그러한 착시현상이 일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 닦는 일에 출실하다’는 말은 성수 큰 스님의 가르침이다. 스님은 경기도 용인 토굴에 주석하고 있던 성수 큰 스님을 스스로 마음을 내어 1년간 시봉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법거량을 하겠다는 욕심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단지 큰 스님이 던지는 한마디의 경책을 듣고 싶었고, 가까운 곳에서 법문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 속에서 공부의 길을 스스로 찾아든 것이다.
“착시현상의 근원에는 육근(六根)이 있습니다. 눈·귀·코·혀·몸·뜻으로 이루어진 여섯 감각기관이 주체가 되어 분별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을 쉬기 위해서는 육근의 허망한 습기(習氣)를 벗어나야 압니다.”
그런 탓인지 스님은 매사에 이(理)와 사(事)를 분명하게 한정한다. 이로 인해 대중과는 좀 떨어진 듯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사(事)에 국한될 뿐이다. 이(理)를 위해서 큰 스님의 회상(會上) 찾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든 ‘자성(自性) 화두’에 매진했다. 사(事)에서는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성수·관응·우룡 큰 스님의 회상에서 법문 듣고 자성을 밝히길 주저하지 않았다.
화두에서 대의정은 화두 타기의 중요한 덕목이다. 스님은 의심으로 점철된 부정적인 ‘의정’보다는 화두를 풀기 위해 노력의 과정에서 즉, 긍정적인 ‘의정’을 강조한다. 이는 자성 화두를 들고 큰 스님의 회상을 찾아들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훈습을 통해 수승한 화두 타기에 매진한 것이다. ‘소리를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고[反聞聞性]’, ‘관찰자를 관찰하는[觀觀者]’ 것으로 원통(圓通)의 묘를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소리와 색깔 등 바깥의 생멸경계[事]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분별이 사라지며 보리가 현전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조각가가 나무둥치의 불필요한 부분을 따내기만 하면 그대로 완성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작[수행]과 실천[신행]으로 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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