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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지 않았다
수좌들이 기억하는 조계종 명예원로 은암당 고우 대종사
2일 오전 10시 30분 봉암사서 전국선원수좌회장 엄수
2021년 09월 02일 (목) 10:40:36 서현욱 mytrea70@gmail.com
   
▲ 8월 29일 입적한 은암당 고우 대종사.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전하라.”는 말을 남긴 은암당 고우 대종사는 그저 그렇게 살다가지 않았다. 수좌는 물론 재가자, 일반인들에게까지 한국 수행 전통의 핵심인 간화선을 쉽게 알리고 대중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은암당 고우 대종사는 2019년 12월 돌연 입적한 봉암사의 영원한 수좌 적명 스님의 가장 가까운 도반 중 한 명이었다. 적명 스님을 잃은 한국 선불교계는 고우 스님을 떠나보내면서 간화선풍의 양대 산맥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천하 산하대지를 환히 비추던 빛을 잃은 것처럼 적막에 싸였다. 선 수행으로 불조 혜명을 잇는 수좌 스님들은 고우 스님을 어떻게 기억할까.

장례를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하는 이유는

8월 1일 희양산 봉암사에는 전국의 선원을 대표하는 수좌들이 대거 모였다. 혜국 스님(석종사 조실)을 비롯해 법연 스님(봉암사 선덕, 봉암사 제2결사 당시 고우 스님 동행 수좌), 영진 스님(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백담사 유나), 일오 스님(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도성암 선원장), 진범 스님(봉암사 주지, 장의집행위원장), 선법 스님(장의집행위원장, 수좌회 의장), 수불 스님(안국선원장), 원타 스님(장의집행위 총도감, 해인총림 유나), 함현 스님(전 봉암사 주지), 철산 스님(포항 보경사 주지, 선원장), 중산 스님(문도대표, 수좌), 금강 스님(원명선원장, 중앙승가대 교수)이 한 자리에서 고우 스님과 겪은 일화들을 담담히 털어 놓았다.

고우 스님은 조계종 최고의결기구인 원로회의 원로의원이었다. 원로의원을 마치면 명예 원로의원으로 조계종단의 이판사판 스님들의 존경을 받는다. 보통 원로의원을 지낸 스님들의 장례는 ‘원로회의장’으로 치르는 게 종법 상 규정이지만, 은암당 고우 대종사의 장례는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엄수된다. 전국선원수좌회장은 조계종단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전 종정 서암 스님과 최근 입적한 적명 스님의 장례가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엄수됐을 뿐이다.

영진 스님(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백담사 유나)은 “종단의 장례는 ‘종단장’, ‘원로회의장’ 등이 있다. 고우 스님은 명예 원로의원으로 마땅히 원로회의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하지만, 생전 고우 스님의 말씀과 문도들, 구참 수좌들과 봉암사 대중들의 뜻이 모여 장례를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엄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진 스님은 “고우 스님은 ‘제2 봉암사 결사’의 주역으로 봉암사가 현재 100여 명이 넘는 수좌들이 수행하는 도량이 되는 데 공로가 가장 큰 분”이라며 “범룡 스님, 서암 스님, 적명 스님 정도만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로 드물었다.”고 했다. 고우 스님의 장례를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치르는 것은 그만큼 생전 고우 스님의 덕화가 얼마나 드넓은 지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입적을 예감한 고우 스님, 주변 깔끔히 정리”

고우 스님은 생전 삶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스스로 회향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혜국 스님은 “입적하기 보름 전, 고우 스님은 평소 통장에 돈도 얼마 없었지만 이마저도 금봉암으로 모두 옮기고 서류도 다 정리했다고 하셨다.”면서 “그 때 한 말씀하라 청하니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달라고 하셨다. 오고감이 없이 훌쩍 떠나시는 그 모습이 곧 고우 스님의 가르침일 것이다. 이런 스님의 마지막 길도 그분의 가르침이니 많은 이들이 스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길 바란다.”고 했다.

고우 스님의 재가제자인 박희승 불교인재원 교수도 “고우 스님은 70세가 넘어 단 번에 운전면허를 취득하셨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이유는 법문을 다닐 때 신세를 덜 지려 하셨기 때문이었다. 면허를 따고 승용차를 마련해 법문을 다니셨다.”며 “얼마 전 금봉암에 승용차가 보이지 않아 스님께 물으니 ‘이제 차가 필요 없어 처분했다.’고 하셨다. 마치 당신의 입적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다.”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박 교수는 “고우 스님은 재가자들에게도 바르게 공부하면, 출가해서 공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다.”면서 “스님은 늘 부처님의 깨달음은 ‘중도’여서 중도를 공부해 바른 안목을 갖추면 지혜롭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고 했다. 고우 스님은 불교인재원과 선림원 등 참선 단체의 증명 법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법문 요청을 거절하는 바 없이 한 걸음에 달려와 ‘중도’의 가르침을 펼쳤다.

   
▲ 9월 1일 은암당 고우 대종사 생전 일화를 설명하는 수좌 스님들(왼쪽부터 수불, 일오, 혜국, 영진, 원타 스님).

적명 스님 “돈오돈수·돈오점수 어떻게 정립하느냐” 질문에
고우 스님 “도를 모두 전하지 못해도, 중도 아는 것이 중요”

고우 스님은 조계종단이 펴낸 ‘간화선 지침서’가 세상에 나오도록 힘썼다. 고우 스님은 말과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간화선의 핵심을 글로 세상에 내놓아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전통의 소중함과 긍지를 드러내 보였다.

혜국 스님은 “간화선 지침서를 내기 전 중국의 선종사찰을 다녔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간화선은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자, 고우 스님은 ‘허공에도 이 나라, 저 나라가 있느냐, 허공은 한 허공일 것인데, 간화선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냐, 지금 간화선이 살아있는 곳이 곧 간화선이 있는 곳 아니냐’고 하셨다.”고 했다.

또 “중국 사찰의 방장들이 30대, 40대들이었다. 고우 스님이 ‘육조 스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중국 방장은 등신불 가리킬 뿐 답을 못했다. 그러니 고우 스님은 중국이 문화혁명 당시 선수행 문화를 모두 없애 이런 결과가 온 것이라 하셨다. 고우 스님이 중국 방장에게 한 질문 정도에 대답할 사람은 한국에 많다면서 한국 간화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우셨다.”고 했다.

혜국 스님은 “말 이전의 소식을 전하는 데 어떻게 글로 하려 하느냐는 주변의 만류에 고우 스님은 ‘안 되면 안 되는 한계 내에서 하면 될 일’이라며 간화선 지침서 발간을 주도하셨다.”고 했다. 또 “간화선 지침서 발간에 고우, 무여, 혜국, 의정, 설우 스님 등이 참여했는데, 하루는 적명 스님이 ‘지침서에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어떻게 정립해 기술할 것이냐?’ 물으니, 고우 스님은 ‘도를 모두 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발심해 중도의 사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혜국 스님은 “고우 스님은 아상을 내놓은 경우가 없고, 대종사라는 생각도 없이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았고, 공성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성에서 나온 그림자도 인정하고, 그 흔적이 없음도 인정하신 분”이라고 했다.

고우 스님도 한 때 승소(僧笑, 국수)에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상주 심원사 토굴에 있을 때 지유 스님(현 범어사 방장)과 혜원 스님, 내(혜국)가 모여 국수가 먹고 싶다고 밀가루 한 포대를 구해왔다. 심원사에서 산 넘어가 화북까지 가서 한 가게에서 국수 기계를 하루만 빌려 달라 사정해 빌려왔다. 그 빌린 기계로 국수를 뽑아 먹었는데, 몇 달 만에 맛 본 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국수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런데 국수 기계를 하루만 빌리기로 했으니 당장 돌려줘야하는 데, 돌려주러 가는 길에 배가 너무 불러 나무 밑에서 쉬다가던 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수행자들이 양식 걱정하던 시절이니 국수 몇 그릇이 얼마나 귀했을까. 고우 스님도 국수에 웃음 지었던 때가 있었다.

“부처님 당시와 같이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보자”
제2 봉암사 결사로 순수한 수좌도량 기틀 만들어

1947년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부처님 뜻대로 살자’면서 청담, 성철, 자운, 우봉, 보문 스님 등이 일으킨 봉암사 결사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2 봉암사 결사는 불자들에게도 생소하다. 고우 스님은 1967~8년 제2의 봉암사 결사를 이끌고 현재 조계종립선원 봉암사가 한국 간화선의 고향처럼 수좌들만이 수행 정진하는 도량으로 만드는 기틀을 닦은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생전 고우 스님은 제2 봉암사 결사에 대해 “문경 김룡사 선원에서 열 명의 대중들이 부처님 당시와 같이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결사 취지로 봉암사에 가게 됐다.”고 털어 놓은 바 있다. 그때 지유 스님(현 범어사 방장)이 주지를 맡고 고우 스님이 총무로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제2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스님 중 백련암 법연 스님과 선원장 정광 스님이 있었고, 강백 무비 스님도 오갔다. 처음에는 대중방이 없어 각방에서 수행했다. 고우 스님이 마흔이 넘어 범어사에서 한 철 살고 오니 봉암사 살던 대중이 총무원에 엉터리 이력서를 넣고는 고우 스님 앞으로 주지 임명장을 끊어 왔다. 주지를 맡고 나서 대중들이 한 곳에서 수행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소매를 걷어 붙였다.

원타 스님(해인총림 유나)는 “봉암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내면서 고우 스님을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들었다. 고우 스님은 ‘1962년 조계종이 정식 탄생한 후에도 봉암사는 비구승 수좌들이 사는 도량이 아니었다.’고 회고 하셨다”면서 “성철, 자운 스님 등이 봉암사 결사했지만 6·25전쟁 이후 흩어졌고, 1962년 조계종이 창종된 후 1968년 고우 스님과 법연 스님, 무비 스님 등 7, 8명이 중심 되어 2~3년 봉암사에 살면서 순수한 수좌도량 기틀 마련했다.”고 했다.

원타 스님은 “당시 봉암사 벽운암이라는 토굴에 법진 스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 스님 밑에 대처승에게 겨울 살 양식을 부탁했더니 대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무비 스님 등과 함께 인근 김룡사에 계시던 고우 스님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니 스님이 ‘수좌들이 책임지고 봉암사를 가꾸고 운영하라고 해서 제2의 봉암사 결사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스님은 또 “그 당시 대처승들이 벌목 허가를 받아 벌채하려는 것을 고우 스님과 젊은 수좌들이 살면서 몸으로 희양산의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았다. 문경시청 산림과 공무원과 벌채업자들과 싸워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감옥에서 한 달을 살기도 하면서 봉암사의 기틀을 닦았다. 그 덕에 현재 희양산 봉암사의 자연환경이 보존되고 좋은 계곡을 향유하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했다.

원타 스님은 “고우 스님은 서암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젊은 수좌들이 수행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1980년 초 마을의 재실 집을 사다가 건물을 지어 60여 명의 수좌들이 사는 기반을 만들었고, 1980년대 들어서 봉암사 주변이 국립공원화 되는 것을 막아내고 종립선원으로 지정하도록 했다.”면서, “서암 스님과 동춘 스님을 설득해 조실과 주지를 맡도록 하고 100명이 넘는 수좌들이 살 수 있는 대가람을 만들었다. 고우 스님은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어디에 있더라도 봉암사에 달려와 본인의 일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봉암사가 수좌들의 고향이 되도록 했다.”고 전했다.

원타 스님은 “고우 스님은 성격이 검소하고 소탈했으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어느 위치의 사람이나 따뜻하게 웃으며 대하셨다.”면서 “때문에 전국 수좌들이 표상으로 삼고 존경했다.”고 했다.

“중도 법문으로 사회 갈등 해소 노력”

그러면서 “고우 스님은 중도 사상에 입각해 모든 스님들의 생각을 부처님 가르침 근본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1990년 중반부터 열심히 하시고, 많은 중도 법문으로 사회갈등 해소에도 노력하셨다.”면서 “봉암사를 떠나 금봉암 암자에 계시면서도 동방장(조실채)으로 모셨고, 적명 스님을 봉암사 수좌로 모실 때도 고우 스님께 부탁해 이루어졌다. 함현 스님이 주지하실 때인데, 적명 스님이 수좌를 맡으면서, 고우 스님이 봉암사에서 다비나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했다.

일오 스님도 “고우 스님은 봉암사 안에 계시나 밖에 계시나 봉암사와 함께 하셨고 수좌들과 함께 하셨다. 스님의 장례를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며 “스님의 삶은 일생동안 수행자로, 청빈하게 흠결 없이 올곧게 사셨기 때문에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회고했다.

수불 스님(안국선원장)은 “45년 전 범어사에서 고우 스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늘 정진하라고 하셨고, 금봉암에서도 끝까지 공부하고 정진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면서 “경주 동국대병원에서도 일어나실 것 같더니만, 나 이제 간다고 생각하셨는지 가셨다. 스님이 하루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 죽으면 봉암사에서 다비나 해주면 어떻겠나”

봉암사 주지를 지낸 함현 스님은 “내가 봉암사 주지할 때, 역대 주지 스님들을 초대해 봉암사운영위원회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고우 스님은 ‘봉암사 대중이 잘 살고 있는데 전에 주지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면 되느냐고 하셨다.”고 했다.

또 “한 번은 고우 스님을 모시기 위해 나와 어른 스님들이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때 고우 스님은 ‘나는 건강도 나쁘고, 봉암사 대중들이 활발발하고, 힘에도 부치니 제방에서 누가 제일 활발발하냐?’고 하셔서 적명 스님을 수좌로 모시게 됐다.”면서 “주지도 왔고 수좌 스님도 오셨는데 내가 죽으면 봉암사에서 화장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전하라.”던 고우 스님은 봉암사의 기틀을 닦고, 수좌들의 고향을 만들었으며, 수좌들을 대표하는 전국선원수좌회를 만들어 주춧돌이 되었다. 간화선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해 ‘간화선 지침서’를 만들어 세상에 선보였고, 노구에도 출가승이건 재가자건 누구에게든 중도 법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명예 원로의원 은암당 고우 대종사의 영결식은 9월 2일 오전 10시 30분 희양산 봉암사에서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엄수된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 업무 제휴사인 <불교닷컴>이 제공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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