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제공 = 장의위원회.

8월 29일 문경 봉암사 동방장실에서 원적한 조계종 명예원로의원 은암당 고우(隱庵 古愚, 1937~2021) 대종사는 2019년 12월 24일 입적한 수좌 적명 스님과 함께 한국선불교를 대표했다.

1937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고우 스님은 어린 시절 책 보기를 좋아해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군 복무 중 갑자기 폐결핵에 걸려 제대한 뒤 방황하던 중 26세에 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김천 수도암에서 출가했다. 은사는 직지사 영수 스님.

스님은 수도암에서 공부하며 폐결핵이 저절로 나았다고 회고했다. 청암사와 남장사 강원에서 고봉, 관응, 혼해 대강백에게 강원 교과를 이수하며 불교관을 정립했다. 강원을 마칠 무렵 참선에 발심해 29세에 향곡 스님이 주석한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낸 이래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며 평생 참선의 길을 걸었다.

고우 스님은 ‘제2 봉암사 결사’의 주역이며, 조계종 종립선원 봉암사 태고선원의 기틀을 다진 이로 평가된다. 1968년 문경 김용사에서 법련, 무비, 법화, 정광, 혜규 등 십여 명의 선승들이 모여 봉암사가 구산선문의 유구한 수선도량이자 결사처인데 전쟁으로 끊어진 전통을 되살리자며 ‘제2 봉암사 결사’의 뜻을 모아 봉암사로 들어갔다. 당대 선지식 서옹, 서암, 지유 스님을 모시고 주지 소임을 맡아 도반들과 함께 조계 선풍과 결사 정신을 되살려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 종립선원 봉암사 태고선원의 기틀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 문경 심원사에서 지유, 대효 스님과 정진하던 중 하루는 불현듯 ‘무시이래(無始以來)’라는 말뜻을 깨닫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당시 선원이 대체로 돈오점수(頓悟漸修) 공부하는 이들이 많았고, 스님도 그런 견해로 공부하던 때라 돈오(頓悟)했다고 생각하고는 제방을 유력하였는데, 1975년 어느 날 남해 용문사 염불암에 있던 중 갑자기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한 성철스님이 오셨다. 마침 잘 되었다는 마음으로 가사 장삼을 수하고 삼배 드리자마자, “스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맞지 않습니까?” 하고 대들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성철스님은 획 돌아누워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물러나왔는데, 후일 성철스님의 《백일법문》과 《선문정로》를 보고는 그때 돌아누워 아무 대꾸하지 않은 것이 그대로 법문임을 깨닫고 더 대들지 못했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고우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직후 봉암사 탄성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모시고 총무부장으로서 10·27법난 수습과 종헌 개정 등 일대 개혁조치를 한 뒤 3개월 만에 다시 봉암사로 돌아왔다.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고는 불교에 10·27법난을 자행해 당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비롯해 종단 주요 소임자들이 계엄군에 연행돼 총무원 기능이 마비됐다. 그러자 봉암사 대중들이 공사를 열어 조계사에 올라와 총무원을 임시로 운영하면서 고우 스님이 총무부장으로 고난과 역경의 시기를 이겨냈다.

1987년 봉화 각화사 동암에서 정진하던 중 무심코 《육조단경》의 <정혜품>을 보다 ‘백척간두진일보’의 뜻을 깨치고는 마음이 환해졌다. ‘평소 공부를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마음으로 각화서 서암으로 가서 시중의 불교 교리서와 법문을 몽땅 구해서 살펴보니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이 부처님 팔만대장경을 잘 요약하여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성철 스님과 선의 돈오돈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고우 스님은 늘 불교의 근본이 중도(中道)이고, 선(禪)은 중도를 체험 실천하는 것이라 했다. 스님은 선(禪)에서는 경전과 교(敎)에서 말하는 ‘중생이 닦아서 부처된다.’는 말을 손가락 방편으로 보고, 자기 마음이 그대로 깨달아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을 달, 즉 법이라 하였다. 우리가 본래부처인데, 중생이라 함은 착각이니 그 착각 망상을 완전히 없애 본래부처로 돌아가려면 일체 번뇌망상을 완전히 타파하는 확철대오(廓徹大悟)가 깨달음의 기준이라 했다.

고우 스님은 도반 적명 스님과 한국 선불교의 유구한 선 수행을 바르게 하고 선을 널리 전하기 위해 선납회(禪衲會, 현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해 공동대표를 맡았다.

1987년에 참선 수행자도 경전과 조사어록을 공부하여 정견을 갖추고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해인총림에서 전국 선승들과 함께 ‘제1회 선화자법회’를 주도해, 당시 종정 성철 스님이 ‘육조단경 지침 법문’을 하고 서암 스님이 ‘육조단경 강의’, 일타스님이 ‘율장’ 특강을 하여 수좌 500여 명이 수일 동안 탁마 정진하는 선문에서는 보기 드문 법회를 열어 선풍을 진작했다.

2002년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을 맡아 결제 대중의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 결사를 이끌었다.

2000년대에 남방불교에서 빨리어 경전이 번역 소개되고 초기경전과 위빠사나 수행, 티베트불교 수행이 도입되어 화두 참선과 충돌이 일어나 대중이 혼란스러워 하자, 선원수좌회의 공의를 모아 무여, 혜국, 의정, 설우 스님과 조계종 교육원의 지원으로 2005년에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을 편찬하여 화두 참선의 현대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2006년에 봉화에 금봉암을 창건해 주석하며, 제방에서 선(禪) 법문 청이 오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갔다. 평생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여 법문 다니는데 필요하다고 운전면허시험을 보아 단번에 통과했다.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고, 대종사(大宗師) 품계를 받았다. 종단 원로로 종단의 청정 종풍을 진작하기 위해 애썼고,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려면 불자들이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공부해서 정견을 갖추고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2011년에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조계종 한국문화연수원이 주최한 간화선과 위빠사나 국제연찬회에 간화선을 대표해 참석하여 위빠사나를 대표하는 미얀마 파옥 스님과 2박 3일 동안 문답 대화하였다. 평소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화두를 참구하여 깨치는 길을 가장 지름길이라 보았지만, 염불이나 위빠사나, 지계와 보시, 봉사도 불교 수행으로 다 같이 평등하다고 보았다.

고우 스님은 평소 한국불교의 선(禪)이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고 강조해 왔다. 중국은 공산화와 문화혁명으로 선맥(禪脈)이 단절되었고, 일본은 의리선(義理禪)으로 변질되었지만, 오직 한국불교 조계종만이 조사선, 간화선풍의 원형을 전승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은 앞으로 세계에서 한국 간화선풍을 주목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했다. 때문에 종단 차원에서 국제 선센터를 세워 간화선 인재를 양성하기를 발원하고, 선원수좌회 차원에서 봉암사 앞에 세계명상마을 건립을 적극 성원했다.

2012년 조계사 선림원 증명법사에 추대되어 불교인재원과 서울 도심에서 재가자들에게 중도 정견과 화두 참선을 안내하는데 애썼다. 백일법문 대강좌에는 수백 석 강의장이 늘 만석이었다.

스님은 평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입장에서 절에 제사와 불공을 일체 하지 않고 오직 법문과 참선 수련만 했다. 심지어 부처님오신날 연등도 켜지 않았다. “왜 절에 연등을 켜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형의 등 공양도 좋지만, 마음의 등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또 절 아래 마을 사람들이 세운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낡아 새로 짓는다고 하자 선뜻 적지 않은 돈을 보시했다. 어린이들을 좋아해 절에 아이들이 오면 남모르게 용돈을 주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었다.

고우 스님은 80세가 되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이제는 은퇴할 때”라며 일체 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수 빨래를 하며 검소하게 소욕지족으로 살았다.

말년에 스님은 가까운 이들이 안부를 여쭈면 “폐결핵으로 죽으려고 절에 왔는데, 불교를 만나 병도 낫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다.”며, “아무런 여한이 없다. 이제 빨리 가야지.”라고 했다. 또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전하라.” 했다.

참선과 함께 선수행 길을 걸어온 고우 스님은 80세가 되자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당뇨는 물론 폐, 심장 등에 병을 얻어 최근 봉화군 읍내 병원을 찾았다가 경주 동국대병원으로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수좌들은 스님의 건강이 악화하자 이날 봉암사 동방장실로 옮겨 예를 갖췄다. 봉암사 동방장실이라는 이야기에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스님은 조용히 속세의 연을 마감했다. 이때가 세수 85세, 법납 60세였다. 제자들이 엮어낸 법문집으로 《고우 스님 육조단경 강설》과 《태백산 선지식의 영원한 행복》 등이 있다.

스님의 장례는 봉암사에서 5일간 전국선원수좌회장으로 치러진다. 영결과 다비식은 9월 2일 오전 10시 30분 봉암사에서 엄수된다.

다음은 은암 고우 대종사의 약력.

- 1937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남

- 1962년 경북 김천 수도암에서 출가(직지사 영수 스님을 은사로 모심, 폐결핵이 걸리어 제대 후 방황하던 중 26세에 한 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출가)

- 1966년 부산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첫 안거(향곡 스님 주석, 이후 제방선원에서 정진하며 평생 참선의 길을 걸음)

- 1968년 문경 김룡사에서 ‘제2 봉암결사’의 뜻을 세우고 법련, 무비, 법화, 정광, 혜규 등 십여 선승들과 봉암사에 들어가 결사를 시작하여 오늘날 봉암사 기틀 마련.

- 1970년 문경 심원사에 정진 중 공을 이치로 깨달음.

- 1975년 남해 용문사 염불암에 있던 중 성철스님과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논함

- 1980년 10·27법난의 원만한 수습과 종헌 개정 등 일대 개혁조치를 함.( 암사 대중들이 공사를 열어 조계사에 올라와 총무원을 임시로 운영)

- 1987년 봉화 각화사 동암에서 정진 중 ‘백척간두진일보’의 뜻을 깨침. 선승들과 선납회(禪衲會, 현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 합천 해인총림에서 전국 선승들과 함께 제1회 선화자법회 주도

- 2002년 봉화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을 맡아 결제 대중이 15개월 15시간 가행정진 결사를 하게 이끔

- 2005년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을 편찬하여 화두 참선의 현대적인 지침을 제시

- 2006년 봉화 금봉암을 창건. 제방에서 선(禪)법문 청이 오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다님

-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었고, 대종사(大宗師) 품계를 받음

- 2011년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위빠사나를 대표하는 미얀마 파옥 스님과 2박 3일 동안 문답 대화

- 2012년 조계사 선림원, 불교인재원 증명법사에 추대

- 2017년 80세가 되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일체 대중을 만나지 않고 은퇴

- 2021년 8월 29일 봉암사 동방장실에서 입적. 세수 85세 법납 60세.

- 제자들이 엮어낸 법문집 《고우 스님 육조단경 강설》, 《태백산 선지식의 영원한 행복》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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