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공당 월주 대종사.

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태공당 월주 대종사 영결식이 7월 26일 김제 금산사 처영문화기념관에서 엄수됐다.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에서는 명종 5타에 이어 어산 종장 인묵 스님과 화암 스님의 집전으로 영결법요가 봉행됐으며, 문도 대표로 도영 스님과 도법 스님이 차와 향을 올렸다. 원로의원 지명 스님이 월주 스님의 행장을 소개했으며, 평창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죽비로 입정의 시작과 끝을 알렸고, 입정 동안 월주 스님이 BTN ‘뜻 앞의 잣나무’에 출연해 말한 육성법문이 영결식장을 울렸다.

이날 영결식은 종단장으로 봉행됐다. 상좌이자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이 종단장장의위원장을 맡아, 영결식에서 상좌가 영결사를 하는 이채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원행 스님은 “출가사문으로 생사(生死)와 별리(別離)의 경계는 마땅히 넘어서야 하겠지만, 스승을 보내드려야 하는 이 비통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며 “1961년 금산사 도량에 주지로 부임한 이후, 60여 년 간 손수 어루만지던 돌덩이와 초목은 지금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대종사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며 눈물지었다.

원행 스님은 이어 “태공당 월주 대종사는 일평생 우리 종단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 정진하셨던 종문(宗門)의 사표이시다. 젊은 시절부터 종단 대소 소임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두 차례에 걸쳐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역임하셨다.”며 “매사 공심(公心)을 앞세우며 종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던 삶은 종단사에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원행 스님은 또 “ 대종사는 이 시대 진정한 보현보살이셨다.”며 “1980년에는 광주로 달려가셨고, 최근엔 멀리 아프리카 지역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절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집을 건립해 할머님들을 정성껏 돌봐주셨다.”고 밝혔다. 원행 스님은 마지막으로 “대종사께서 남기신 자취가 너무도 크고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이다. 사무치게 그리운 존사(尊師)의 존호(尊號)를 다시 불러본다.”며 속환사바(速還娑婆)를 기원했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직접 영결식에 참석해 영결법어를 내렸다. 진제 스님이 영결식에 참석해 법어를 한 것도 최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여러 영결식에서 종정 법어는 원로회의 의원이 대독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진제 스님은 “대종사께서는 생사무상(生死無常)의 고통을 느끼고 출가를 단행(斷行)하신 이래 수행과 포교와 중생구제가 불이(不異)함을 일생일관(一生一貫)으로 실천하신 선지식(善知識)이었다.”며, “산중불교(山中佛敎)만이 아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중생교화를 위해 몸소 사바세계에 뛰어들어 중생과 함께하며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시현(示現)하였다.”고 했다.

이어 “종사께서는 종단(宗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종단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불교의 역할이 편안과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늘지고 고통 받는 중생과 함께하는 것이기에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하신 종장(宗匠)이셨다.”면서, “산승(山僧)이 금일 태공당 월주 대종사 각령(覺靈) 전에 법공양을 올리오니, 잘 받아 간직하시어 역겁(歷劫)에 매(味)하지 않고 진리의 삼매락(三味樂)을 누리소서.”라고 법어했다.

조계종 원로의장 세민 스님도 직접 참석해 추도사를 했다.

세민 스님은 “대종사께서는 생몰도 없고 오고감이 없는 무일물(無一物)을 풀어놓고 우리 곁을 떠났다.”면서 “여기 모인 대중은 자애하던 모습으로 이끌어주신 그 진용(眞容)을 다시 볼 수 없어 슬픔에 빠졌다. 대들보가 무너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우리 현대불교사를 이끌어온 산 증인이요 살아있는 역사요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리고 불교의 미래를 여는 혜등(慧燈)이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었다.”고 했다.

세민 스님은 “주장자를 짚고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사회 구석구석 고통을 증언하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때로는 불우아동을 돕는 운동에 앞장서고 때로는 캄보디아 가난한 마을 우물파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헌신한 분도 스님이었다.”며 “지금 종도들은 정신적 기둥을 잃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무너진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오고감이 없는 기용(機用)으로 은현자재(隱現自在)함을 한 번 보이시라”며 추모했다.

중앙종회 의장 정문 스님,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 경우 스님,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일오 스님, 김희중 대주교(가톨릭 광주대교구장), 홍파 스님(한구불교종단협의회 부회장, 관음종 총무원장), 주윤식 중앙신도회장의 조사, 문재인 대통령 조전, 이원욱 정각회장 등의 조사가 이어졌다.

중앙종회의장 정문 스님은 “스님께서는 지난 60여 년간 조계종 현대사의 모든 전환점마다 주인공이셨습니다. 불교정화운동, 금산사 주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하시며 ‘불교의 자주화’와 ‘보살행의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확신을 세워 나가셨다.”면서, “모든 날을 마지막 날처럼 살았다고 하시는 스님 일생은 보살의 삶 그 자체였다. 오늘 이 자리는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또한 원각도량이다. 얼른 돌아오셔서 보살의 행원 이어가소서.”라고 추도했다.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 경우 스님(선운사 주지)는 “큰스님께서는 종단이 격동의 시간을 거칠 때마다 가장 앞자리에서 정법(正法)의 등불을 높이 들어 위기의 종문(宗門)을 안정과 화합의 승가로 이끌어주셨다.”며 “그러하기에 일찍이 우리 종문의 당간지주이셨으며, 삶 자체로써 인천(人天)의 사표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과 밖을 따로 두지 않는 불이의 삶 그 자체이자, 민족과 국가를 넘어 자비를 펼쳐 보이신 큰스님의 족적은 보살 화현 아님이 없기에 우리 후학들은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천경만론(千經萬論)을 다 외운다 해도 실천이 없다면 헛일이라고 일렀던 큰스님의 지고한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중생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가일층 정진, 또 정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일오 스님은 “최상승 보살은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속제(俗際)의 인정에 머무는 우리 후생들은 생사가 역연하고 열반이 환망(幻妄)하니. 대종사의 영결은 분명 조계의 슬픔이요, 근역(槿域)의 아픔”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종사께서는 나와 너, 어린이와 노인, 남과 북. 국가와 세계가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 입각하여 모두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지구촌 공생의 인간 사랑과 생명 사랑을 두루 실천하시어 깨달음의 사회화·자비의 세계화를 이루었으니 이 또한 종문의 안목이요, 역사의 긍지”라고 추도했다.

김희중 천주교 대주교는 “큰스님께선 시대의 선지자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종교, 민족, 이념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천했다.”며, “앞으로도 스님 모습과 가르침에 대한 기억의 지킴이가 되겠다.”고 했다.

주윤식 조계종 중앙신도회장은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나와 이웃, 사회와 지역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에 더불어 사는 모든 존재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나누며 사는 것이 불자의 도리임을 강조하셨던 큰스님”이라며 “세간을 떠난 깨달음은 토끼뿔, 거북털이니 처음도 끝도 세상과 함께해야 한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며, 스님께서 일구어 놓으신 보살행의 발자취를 후대에 올곧게 전하고, 더욱 정진하여 불자로서 본연의 자리를 지켜나가겠다.”고 했다.

지난 23일 금산사를 찾아 조문한 문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구도의 삶과 이웃의 고통을 품어주는 이타행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몸소 보여주신 스님의 입적이 안타깝다.”며 “스님께서 말씀하신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아프고 힘든 이웃을 보듬고 함께한다면 우리 국민은 코로나의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종단의 역사는 월주 스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걸어오신 길, 혁신을 거듭하셨다.”면서, “주지부터 조실,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금산사에서 스님을 보내드린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믿는다. 담대하면서도 인자하신 그 모습은 다시 뵐 수 없겠지만 보여주신 가르침은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박준배 김제시장은 “한 결 같이 소외 받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몸 바치신 큰스님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울 수는 없겠지만, 떨어진 잎이 다시 거름이 되어 뿌리를 튼튼하게 하듯이 세상을 밝히시는 큰 나무의 뿌리가 되기 위해 돌아가셨다.”면서 “큰스님의 살아오신 열정과 같은 여름날이 되면 큰스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겠다.”고 했다.

오영우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과 이원욱 국회 정각회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회장 홍파 스님(관음종 총무원장)도 조사로 월주 스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나눔의집 할머니도 영상으로 월주 스님 입적을 애도했다. 강일출 할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보고 싶고 놀고 싶다. 역사문제를 많이 말하고, 우리가 기억을 많이 하고 있는 거다. 월주 스님이 돌아가실지 몰랐어.”라고 했다.

안숙선 명창은 월주 대종사가 평소 화두로 삼았다는 <심청>가 중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조가로 불렀다.

이날 상좌 도법 스님은 ‘은사의 삶을 그리며’라는 글로 월주 스님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도법 스님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구절로, 월주 스님의 삶을 ‘날마다 새로운 날을 창조하다’로 정리했다. 도법 스님은 “보살행 수행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당신의 삶 자체가 임종에 즈음하여 남길 수 있는 최후 최고의 한마디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앉는 것도 깨달음의 실천인 보살행 수행이요,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깨달음의 실천인 보살행 수행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소 도법은 스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다. 따뜻한 밥상 한 번, 용돈 한 번 올리지 않았다. 불효라고 말하면 그 첫 자리는 제 자리”라며, “뒤늦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스님께서 보여주신 깨달음의 실천인 보살행 수행을 내 삶으로 살도록 하겠다. 그리하여 그 첫 자리가 효도라면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맏상좌 도영 스님은 문도 대표로서 인사했다.

도영 스님은 “저희 스님은 평소 청정심과 자비심으로 요익중생하라고 저희를 가르쳤다. 바로 실천에 옮기라 하셨고, 저 멀리 케냐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부르는 곳마다 달려가셔서 힘껏 돕다 보니까 많이 몸이 쇠약해지셨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열심히 일을 해 오셨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점 널리 용서해 달라. 저희 제자들은 스님 가르침에 의지해 서로 화합하고 스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정진하겠다. 여러분께서도 지도해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종정, 원로의원, 교구본사 주지, 종단 교역직 종무원, 대선 주자들이 헌화했다.

종정 진제 법원 대종사, 총무원장 원행 스님,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 밀운·명선·현해·암도·대원·원경·성우·보선·법타·일면·자광·지명·도후·우경 스님 등 원로의원, 해인사 방장 원각 스님, 동화사 회주 의현 스님, 전계대화상 무관 스님, 호계원장 보광 스님, 교육원장 진우 스님, 포교원장 범해스님, 장의위원회 집행위원장 금곡 스님, 전 포교원장 혜총 스님,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 경우 스님 등 교구본사 주지 스님이 헌화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 최재성 전 정무수석 등도 헌화했다.

영결식 이후 월주 스님의 법구는 금산사 초입의 연화대로 이운돼 다비식이 엄수됐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영결식과 다비식은 참석자가 제한됐다.

월주 대종사의 49재는 7월 28일 초재를 시작으로 9월 8일 막재까지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김제 금산사에서 봉행된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 업무 제휴사인 <불교닷컴>이 제공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