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6월 1일 일본 교토 진여산장에서 있었던 일본 교토회동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유성철 조불련 상무위원, 일본 조불협 기획실장, 신법타 평불협 회장,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 서태식 일본 조불협 회장, 한성기 조불련 국제부장. 사진 출처 평불협 《하나로》 1994년 7·8 합본호.

1991년에서 1994년까지의 틈새는 컸다. 이때 북한 불교계는 국외를 통한 남측의 접촉 제의를 비롯한 일체 사안에 대해 응대하지 않았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1992년 4월 제2차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종교건물의 신축, 종교의식 허용 보장’(제8조)을 명시하는 등 북측 내부의 질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위별 종교 교류까지 확대되지 못했다.

특히, 1993년 3월 12일 조선로동당 중앙인민위원회 제9기 7차 회의에서 평안북도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하여 ‘핵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한반도에 1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는 등 민간과 종교 교류에서도 동력을 잃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남측의 교류 열기와 더불어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표훈사 등 몇 사찰에서 열린 불교 행사 소식은 외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불교련맹 중앙위원회(이하 조불련)의 총본산인 광법사는 1991년 2월 평양특별시 대성구역 대성동 옛터에 다시 개건됐다. 1993년 5월 평양시 력포구역 용산 남쪽 기슭에 새로 개건한 동명왕릉과 정릉사, 1994년 10월 개천절을 기해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정상부에 새로 개건한 단군릉을 비롯해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유적과 사찰 문화재가 대규모로 복원됐다.

북측에서 헌법으로 종교 허용과 북핵 문제 발생으로부터 불교 교류의 호재와 악재가 교차하는 가운데, 1994년 6월 일본 천 년의 도시, 교토(京都)에서는 남·북한 불교지도자의 회동이 처음 이루어졌다. 그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교토회동’의 배경과 주인공 등 그 내막을 살펴본다.

신공안정국의 불교 교류

극비리에 추진된 일본 교토회동은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불교계 인사들조차 몰랐던 사실이다. 교토회동은 1994년 3월 19일 남북정상회담 및 남북 간 현안 협의를 위해 특사 교환을 논의한 남북한 실무대표 8차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가 판문점 회담 도중에 한,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북핵 위기가 증폭되고 남북 대화가 모두 중단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 교토회동은 1994년 6월 1일에 성사되어, 그해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 국면과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이후 남측에서 평양으로 조문 가겠다는 ‘조문 파동’은 문민정부를 자칭한 김영삼 정권에서 신공안 정국의 시발점이 됐고, 북한의 큰물(홍수) 피해에 대해 남측 정부가 냉랭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남북 간 대화 및 교류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보좌관 회의에서 “어떤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여기에다 2019년 11월에 사망한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학원 내 ‘주사파 발언’은 공안정국에 군불을 지폈다. 박홍 루카 신부는 1994년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 주재의 14개 대학 총장 오찬에서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이 있고, 사노맹 뒤에는 사로청이 있으며,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북한은 해외 6개 지역의 범민련 본부에서 팩시밀리를 통해 남한 주사파에게 지령을 보낸다. 이미 북한은 학생들에게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미군기지 반납 운동 등을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라고 발언해 조문 파동에 이어 ‘주사파 파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로부터 공안정국이 되었다.

▲ 1994년 6월 1일 남북 불교 간 회동이 열렸던 일본 교토 진정극락사 진여당 건물, 사진 : 일본 ‘鈴聲山 真正極楽寺 真如堂’ 홈페이지.

문민정부의 기치로 출범했던 김영삼 정권은 1994년 조문 파동과 공안정국으로 역사적 기회를 날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조국을 분단시킨 이승만과 친일·분단 세력과 같이 ‘민족사의 죄인’이라 기록될 수밖에 없다. 1994년 3월 미국의 워런 크리스토퍼 전 국무장관이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폐지돼야 한다는 게,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라고 공식 발표한 데 이어, 미국은 1994년도 《세계인권보고서》 <한국> 편에서 또다시 “국가보안법은 자의적 해석 가능성 때문에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1994년에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구속한 반체제 인사가 1993년의 2배가 넘는 200명 이상”이라고 비판했다. 또 미국은 1997년 1월에 나온 《인권보고서》에서도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시민의 기본권을 자의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등 몇 가지 영역에서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을 가했다.

이처럼 미국은 폐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개정을 요구한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의해 교류 분야에까지 1994년도에 올가미가 채워졌다. 그해 8월, 민주당에서 발표한 《국회 보고서》에는 “김 정권 출범 이후 시국 관련 사범이 7월 말 현재 634명이고, 이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는 283명(44.6%), 올 3월부터 7월까지 시국사범은 419명으로 김 정권 출범 이후 2월까지 1년간의 구속자 222명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라는 통계를 공개했다. 김영삼 정권은 이러한 공안 분위기를 조장해 우르과이라운드 국회 비준과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학생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을 무력화시키고, 보수언론 등을 앞세운 파쇼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붉은 교수, 붉은 야당인사, 붉은 사회단체, 불온 종교인’으로 매도하는 등 법을 무시한 인권을 침해했다.

이때 불온 종교인은 기독교와 가톨릭계 인사를 제외하고, 불교계 2명만이 그 표적이 되어 국가보안법에 따라 체포 구금되었다.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와 이적표현물 제작·반포·판매죄 혐의를 적용하여 국보 33호와 국보 87호의 이름을 붙이고, 국가교정시설(일명 국립선방)에 강제로 입방을 시켜 놓았다. 이로써 일본 교토회동에서 합의되었던 교류 사안과 채널은 다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교류 실무자가 국가보안법으로 구금됨으로써 가동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4년 7월, 공안사건을 계기로 신법타 평불협 회장과 필자는 북측 조불련과 일명 꽌시(uānxì)를 구축하게 된다. 그 후 인맥에 의한 휴민트(HUMINT) 교류에 다가가는 단계로 진전됐다. 한편, 1973년 기상청 통계작성 이래 2위에 해당하는 역대급 폭염이었던 1994년 여름, 국립선방 하안거와 남영동 대공분실의 트라우마, 상처는 아직 그대로이지만 그때 격려해 주신 분들께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994년, 새로운 길을 찾다

일본 교토회동을 통해 ‘교류의 끈’을 다시 이은 평불협 회장 신법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은 1989년 6월 1차 방북에 이어 1991년 4월, 미국 한민족불교교류추진협의회(약칭 한불협) 부회장 신분으로 김도안 한불협 회장과 함께 평양을 2차 방문해 그해 10월 미국 LA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성사될 수 있도록 산파역을 맡았다. 그 후 신법타 회장은 1992년 4월 7일부터 21일까지 태양절 재미교포 방문단과 함께 3차 방북하여 조불련의 남측 초청사항과 ‘제2차 조국평화통일기원법회’ 개최 등에 관해 조불련과 협의했으며, 평남 평성시 안국사와 평양 동명왕릉 및 정릉사 복원공사 현장을 직접 참관한 바 있다.

일본 교토에서의 만남은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일조(日朝)불교친선협회가 서로 일정을 짜 맞춘 듯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만들어졌다. 북측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을 비롯한 대표단은 1994년 6월, 일조불교친선협회의 초청으로 방일했는데, 신법타 평불협 회장은 재일대한기독교회가 공동 주최하는 ‘제4차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에 초청받아 일반 참가자로 신청해서 일본을 방문했다.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일본 동경 한국YMCA에서 ‘민족대단결 원칙의 실천을 위한 교회의 역할’ 주제로 열린 기독자 동경회의에는 북측의 조선기독교도련맹(약칭 조기련) 중앙위원회 강영섭 위원장, 조직부장 리천민 목사, 국제부장 황시천 목사, 선전부장 리춘구 목사, 김남혁 책임지도원 5명을 비롯한 120여 명이 참가했다고, 기독자 동경회의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때 신법타 회장은 기독자 동경회의에서 북측의 조기련 대표단과 상견례를 가진 다음, 본행사와 별도 일정으로 교토로 이동하여 1994년 6월 1일 신뇨산소(眞如山莊)에서 조불련 대표단과 만났다. 북측 조불련은 일조불교친선협회가 초청하여 같은 해 5월 26일부터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하고, 이때 ‘건도기념 조·일 우호 기요미즈데라(きよみずでら) 축제’ 참가를 위해 교토 청수사를 방문했다. 조총련 계열의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약칭 조불협) 서태식 회장이 초청한 교토회동에는 평불협 신법타 회장을 비롯한 조불련 중앙위원회 박태호 위원장, 유성철 상무위원(후일, 4대 조불련 위원장)과 한성기 국제부장이 배석하고, 총련의 조불협 기획실장 등이 동석했다.

이날 교토의 진여산장 회동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불교도의 역할’이란 주제로 토론하고, 1991년 LA 모임에 이어 ‘제2회 남북・북남 해외불교지도자 간담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날짜는 핵 문제가 끝난 뒤로 하며 주최는 평불협 재미본부에서 맡아 추진하기로 했다. 이 사안은 1995년 3월경 조불련이 다시 제의하여 추진하는 것으로 의향을 맺었다. 한편, 이날 회동에서 조불련 위원장은 조계종단의 개혁이 원만히 성사되기를 기원하여 공감을 이루었다.

‘비밀의 회동’이라 불린 교토의 만남은 회담이나 회의가 아니었다. 그냥 한번 다시 보자는데 의의를 둔 짧은 회동이었다. 신법타 평불협 회장이 1992년 4월 평양에서 박태호 조불련 위원장에게 “(국외로) 언젠가 나오시면, 찾아뵙겠다.”라는 인사말이 그 씨앗이 되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려 다시 만남의 기쁨이 되었다.

이지범 | 북한불교연구소장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