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10월 29일 미국 LA 관음사에서 열린 남북 대표단 연석회의에서 남측 대표 서의현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과 북측 대표 박태호 조선불교도련맹 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 제공 이지범.

본 비망록은 집필 목적과 서술 내용의 왜곡 방지 등을 위해, 또한 선의가 아닌 악의 무리가 언제라도 준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둡니다. 필자 스스로가 일종의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라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 글은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나 남한 체제를 부정하는 측면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쓰는 까닭은 남북불교 교류에 관한 기록이 사장되는 것과 자료의 보존과 발굴, 재정리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그리고 교류 당사자로서 해야 할 일종의 의무도 있습니다. 1,700년 남북한의 불교가 통일 또는 통합을 이루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분석과 이해를 돕기 위해 기록하고자 합니다.

이번 비망록의 시점은 그 당시의 단체 대표와 조직 대표단의 성원을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표기법대로, 또 교류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북측이 사용하고 있는 명칭이나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 일부의 인사들이 “내가 다 한 거야.”라는 과장과 함께 “내가 빠졌어.”라고 할 볼멘소리는 그 당시 실무자의 몫이라 판단하고, 본 비망록에서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북측 대표와 실무자들의 주요한 말과 행동은 교류사에 있어 실질적 내용이라 할 수 있으므로 자료와 기억의 범위 안에서 서술하고자 합니다. 또한 일부 인사들이 방북과 행사 참가 등으로 기억하고 말하는 개인적인 내용은 팩트체크 등을 통해 검증된 사안은 포함하거나 다음에라도 수렴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집필자의 수집 자료와 기억에 분명 한계가 있으므로 ‘남북한 불교 교류’라는 기록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도록 강호제현들의 아낌없는 충고와 관심,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필자 주>

남북한의 불교는 1950년에 발발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단절됐다. 반세기 동안 불교는 남북 체제와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됐다. 그 후 교류와 통일을 위한 염원에 다가서는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시도하였으나 곧바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분단 46년 만에 국내가 아닌 미국 땅에서 남북한의 불교는 처음 만났다. 북측의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약칭 조불련) 위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약칭 종단협) 회장을 비롯한 불교종단 대표, 미국과 캐나다, 일본에 거주하는 불교계 인사들도 많이 참가하여 국제 행사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1991년 미국 LA에서 열린 남북불교도 합동법회에 관한 객관적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날 법회 및 행사에 대한 사진은 물론이고, 언론 기사 등 문헌자료의 부재를 넘어 LA 관음사 김도안 주지와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등 몇몇 지도자들이 생을 마감함으로써 다시 고증할 기회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1991년의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는 불교 교류에 있어 출발점이므로 당시 언론 기사와 단체의 기록자료, 개인들의 기록을 참조하여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한 접근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기록을 남겨 두기 위한 작은 바람이라 할 수 있다.

LA 합동법회, 남북불교의 첫 교류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교류 행사의 공식 명칭은 ‘제1차 남북 및 해외동포 조국통일기원 불교도 합동법회’(이하 LA 합동법회)로, 1991년 10월 29부터 11월 9일까지 미국 LA와 뉴욕 등지에서 열렸다.

북측 조불련 대표단(단장 박태호 위원장)이 그해 10월 28일 LA국제공항(LAX)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됐다. 10월 29일~30일 양일간 LA 관음사에서 대표단 실무회의를 미리 개최하고, 이어서 불교도 합동법회를 가졌다. 이때 남북불교계는 10월 31일~11월 4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중부에 있는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샌프란시스코 등 2박 3일 관광과 LA 하얏트 센트릭 호텔에서 만찬 겸 환송법회를 가졌다. 11월 4일 LA에서 출발하여 뉴욕 전등사에서 환영법회를 가졌으며, 11월 5일 뉴욕 원각사 참배, 11월 6일~7일 맨해튼 자유의 여신상 관광과 UN 본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참관을 거쳐, 11월 8일 필라델피아 원각사에서 환영법회를 개최하고, 11월 9일 워싱턴DC 법주사 환영법회를 마지막 일정으로 마쳤다. 조불련 대표단은 그해 11월 10일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귀국했다.

LA 합동법회는 분단 이후, 남북한 및 해외동포 불교지도자 70여 명이 처음으로 만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법회에는 남측 16개 종단대표가 참석하고, 북측 조불련 대표단 4명, 일본의 조총련계 조불협 대표단 3명과 민단계 한불련 대표단 4명, 미국의 미주평불협과 한불협 등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였으며, 남측의 <불교신문>에서 단독 취재를 맡았다. 하지만 이때의 취재 관련 자료는 1994년과 1998년 연이은 조계종 사태로 말미암아 대부분이 훼손되고 소실되었다.

▲ 1991년 10월 29일 미국 LA 관음사에서 열린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 사진 제공 이지범.

1991년 10월 29일 오후 5시, LA 관음사 법당에서 약 2시간 개최한 LA 합동법회는 당일 오전 9시부터 식순과 발언 내용 그리고 호칭 사항과 좌석 배치, 담당자 등에 관한 사전회의를 장시간 동안 조율해서 열렸다. 그날 공동법회는 양측의 최고 수장인 종단협의 서의현 회장과 조불련의 학림당 박태호 위원장이 나란히 서서 합장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냉전의 기류가 흘렀다.

이어서 10월 30일 같은 장소에서 ‘한민족불교지도자연석회의’를 가졌다. LA 합동법회와 연석회의에는 남측 단장 서의현, 대표 송월주ㆍ전운덕ㆍ박해륜이 맡고, 북측 단장 박태호(조불련 위원장), 대표 홍화두(조불련 고문)ㆍ심상진(조불련 서기장)ㆍ이동철(조불련 책임부원)이 맡았다. 미국 측에서 김도안ㆍ신법타ㆍ기대원, 일본 조총련계의 재일본 조선불교도협회에서 홍봉수ㆍ서태식, 민단계에서 이법홍ㆍ이혜륜 등이 참석하였다. 그날 연석회의에서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불교인의 역할’이란 주제로 세미나 형식의 대표 발언을 가졌다. 또 연석회의에서는 남북불교 간의 정례적 교류방안, 불교문화재 공동조사, 북측지역 사찰복원 등 총 8개 항의 안건과 한강ㆍ대동강ㆍ임진강에서 유등(流燈) 법회를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 ‘합동 연등제’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양측이 합의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남북 공동의 유등 법회와 합동 연등제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

미완의 만남, 미완성의 교류

미국 LA에서의 남북 합동법회는 미완의 만남으로 평가됐다. 그것은 남북불교가 분단 46년 만에 합동법회라는 형식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단절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알려진 내용인데, 미국 LA에서 합동법회가 열린 다음에 남측의 한 인사가 국내 언론에서 ‘북한종교는 정권의 시녀’라는 등의 인터뷰 내용이 상당히 문제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속적으로 불교 교류가 전개되지 못한 것은 1993년 3월 북측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시작된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과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란 주요한 원인이 작동되어 중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비롯해 1992년 4월 북한의 헌법 개정과 같이 남북 관계 개선 국면에서, 조불련은 같은 해 5월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표훈사 등 전국의 사찰에서 석탄절 기념법회를 처음으로 여는 등 종교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1991년 10월 29일에 열린 LA 합동법회는 조불련 중앙위원회가 2001년 발행한 《불교도들의 참다운 삶》에도 기록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인 신법타의 《북한불교연구》(2000)에 의하면, “미주평불협에서 1990년 11월 15일을 기해 북한의 조불련에 교류를 제의하자. 조불련은 1991년 1월 15일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남북해외동포 간담회’라는 행사 명칭과 재일본 조선불교도협회(조불협)의 홍봉수 회장과 서태식 부회장을 대표에 포함시켜 초청해 줄 것을 수정하여 다시 제의하게 된다. 이에 미주평불협은 조불련의 수정 제의에 대해 수락을 통보했다. 그리고 1991년 2월에는 재미 승려를 중심으로 ‘한민족불교교류추진미주불교협의회’(한불협, 회장 김도안, 부회장 신법타ㆍ기대원)가 창립하고, 그 총회에서는 미주평불협이 추진한 ‘남북불교 합동법회’를 적극 지지할 것을 결의한다. 그 후 미국 LA 관음사 김도안 주지와 한불협 신법타 부회장은 그해 4월 21일~5월 10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묘향산 보현사에서 처음으로 유점사 종을 33번 타종하는 통일의식을 가졌다. 또 조불련의 청사로 사용하던 평양 용화사 등에서 조불련 박태호 위원장, 홍화두 고문 등과 6차례 회의를 하고, 행사 주최는 한불협으로 주관은 미주평불협이 맡기로 조정하게 된다. 이때 방북을 통해 조불련이 미국 LA 간담회에 공식 참가하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라고 했다.

한편, 조불련의 미국행이 확정된 가운데에서 미국 하와이 대원사의 기대원은 1991년 8월 3일~13일 평양에 가서 그 사실을 또 확인하였다. 8월 17일 조불련으로부터 북측 대표단의 명단과 이력이 한불협으로 제공된 다음, 8월 25일에는 미국의 한불협 회장 김도안, 부회장 신법타, 기대원이 남측으로 들어와 종단협에 공식 보고하면서 LA 합동법회가 협의, 조정하게 됐다. 그로부터 10월 15일을 기해 합동법회는 한국의 종단협가 주최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처럼 추진된 미국 LA 합동법회는 1991년 9월 남북이 유엔(UN)에 동시 가입을 경축하는 배경에서 북측의 국제관계 개선에 따른 별도 조치의 성격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 LA 합동법회는 독자적인 교류 창구의 미비와 국내법적으로 한계를 보여준 미완의 만남, 미완성의 남북불교 교류였다.

■ 이지범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 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이자 북한불교연구소장이다. 저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닷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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