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얀마에서 1년간 수행하며 '위라담마'로 살다 지금은 쉼을 얻고 홀가분하게 작업하고 있는 조재익 작가.

서울은 아직 꽃눈을 살며시 보여주는 이른 봄. 조재익 작가의 일산 작업실에서 객을 맞아준 건 꽃보다 먼저 핀 부처님이었다. 파스텔의 예쁜 색감에 심지어 머리에 꽃도 달고 있는 화사한 부처님.

조 작가는 5월 5일부터 16일까지 종로구 통의동 ‘팔레 드 서울 갤러리’에서 제19회 개인전을 한다. 이번에 출품할 작품은 〈붓다-꽃이 피다〉, 〈옛길-바라보다〉, 〈옛길-물에 비치다〉의 시리즈 작품이며 총 16점이다.

한껏 기쁘게 오는 이를 맞아준 〈붓다-꽃이 피다〉 시리즈는 조 작가의 대표작들로 불상을 통해 존재가 스스로 깨어나는 순간을 표현했다. 나라나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허물어진 간다라 불두나 녹슨 고려 철불두, 미소 짓는 미륵반가사유상의 얼굴, 그리고 내면을 응시하는 표정의 인도 불두 등이 등장한다. 여기에 민화나 분청사기에 있는 꽃 이미지를 결합했다.

〈옛길-바라보다〉 시리즈에는 거대한 불이문과 그 앞에 선 붉은 가사의 수행승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인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불이문을 지나면 스님은 무얼 만나게 될까. 조 작가 자신일 수도 있는 스님을 통해 불이(不二)를 알게 되는 수행의 과정을 함축적으로 캔버스에 담았다.

〈옛길-물에 비치다〉는 물에 비친 화사한 꽃이 한가득이다. 불이문을 지나 쉼을 찾은 구도자는 물이 되어 일어나는 분별과 생각을 하나하나 비춘다. 분별이라는 꽃, 망상이라는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것을 그대로 비춤으로서 마음의 원리를 표현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세월

그는 블로그에 자신의 살아온 역사를 잘 정리해놓았다. 전시회를 모아놓은 자료에는 1998년 4회 개인전 이후 5년 만인 2003년 5회 개인전을 했으며, 그 사이 그림의 스타일과 방향성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인생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사이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군 제대 후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학비와 재료비, 작업실 유지를 위해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과제하고 그림 그리고 술을 마셨다. 시대는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는 어두운 때였고, 자신의 현실 또한 그러했지만 내일은 희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나왔다. 졸업을 하면 나아지겠지, 대학원을 가면 나아지겠지, 대학 강의를 나가면, 전시를 하면 나아질 거야. 그러다보면 폼 나는 훌륭한 작가가 돼있을 거라는 희망. 하지만 대학원을 가도, 강의를 나가도, 전시를 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렵게 개인전을 열고 그림을 걸었는데 작품 세계가 빈약함을 들킬 것 같은 두려움에 전시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작업실로 되가져온 그림은 처박아 두거나 트럭으로 내다버렸다. 결국 화가로서의 행복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술로 세월을 죽이며 긴 터널 같은 시간 안에서 길을 잃었다.

30대 후반,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친구에게 집에서 가까운 선원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소개받은 곳이 남방불교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스승을 만나 터널을 빠져나오다

선원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골방 같은 작은 선원에 미얀마의 한 스님이 초빙되었다, 《대념처경》에 대한 법문을 하던 스님은 중간에 물을 마셨다. 그냥 물을 마셨을 뿐이다. 그런데 ‘온전히’ 물만 마시는 것이었다. 물 마시는 일과 스님의 마음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것 같았다. 흐리멍덩한 의식에서 바라본 스님의 오롯한 모습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선사들이 ‘밥 먹을 때는 밥만 먹는다’고 한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미얀마 스님은 우 조티카 사야도로, 《여름에 내린 눈》, 《붓다의 무릎에 앉아》 등을 써서 미얀마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수행하고자 불교계에 첫발을 내디딘 조 작가는 어떤 인연이었는지 덕높은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 조티카 사야도를 만난 그는 2002년 5월 15일을 정확히 기억했다. 사야도가 이끄는 열흘간의 경주의 집중수행 코스에도 참가해 타이트한 프로그램과 매일 한 시간여의 법문, 그리고 인터뷰를 했다. 아직도 경주의 한 칸짜리 초가집에 앉아 방문을 열어놓고 쪽마루에 앉은 수행자들과 인터뷰하던 우 조티카 사야도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의 구도여행에서 우 조티카 사야도는 첫 스승으로 왔다.

눈앞의 뿌연 장막이 걷히고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현실이 다가온 것 같았다. 조 작가는 얼마 후 작업실을 일산으로 옮겼다. 오랫동안 잡지 못했던 붓을 다시 쥐었다. 마흔 살 가을이었다.

그는 한껏 고무되어 열심히 수행했다. 우 조티카 사야도는 2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켜 2004년 다시 방한했다. 조 작가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열흘간의 수행코스에 참가해 사미계를 받았다.

그 뒤 여행길에 양곤에 있는 우 조티카 사야도의 거처에 방문해 가벼운 법문을 듣고 식사대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 조티카 사야도는 어느 날부터 스승이 아닌 은둔자이길 원하며 일체의 방문자를 만나지 않았다.

마지막 우 조티카 사야도와의 인연은 조 작가가 2007년 미얀마에서 수행하며 비구계를 받고 나서였다. 사야도의 가까운 지인은 그를 반겼지만 사야도를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지인이 사야도와 통화해 그에게 전한 말은 ‘수행의 균형’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상태를 원해 지나치게 수행하는 것을 경계하고 수행처와 바깥생활의 조화와 몸과 마음의 균형을 지키며, 자연스러은 삶에 대한 메시지라고 그는 이해했다. 직접 만날 수 없었지만 스승으로서의 메시지는 자비로웠다. 1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다시 사야도의 거처를 찾았지만 여전히 사야도는 자리에 없었다.

미얀마 학살…피해 없길 기원

미얀마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9시, 10시까지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는 고된 수행과정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탁발 시간이었다. 붉은 가사를 걸치고 맨발로 나가면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이 첫 밥을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은 밥을 사서 보시하는 것으로 전통이 바뀌었지만 미얀마는 아직도 직접 지은 첫 끼니를 가장 먼저 스님에게 보시하는 전통을 지킨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그들은 비를 맞고 서서 젖은 밥을 보시했다. 그리고는 젖은 땅바닥에서 지극한 삼배를 했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받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붓다가 살아계실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제가 속해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답니다.”

그들의 정성과 고스란히 남은 전통은 훨씬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조 작가를 감화시켰다. 당시의 조 작가는 ‘법에 의해 용기 있는 자’라는 뜻의 ‘위라담마’라고 불렸다. 이 법명은 우 조티카 사야도가 몇 년 전에 준 것이었다.

2007년 당시 미얀마 승려들이 주축이 된 ‘샤프란 혁명’ 이 있었다. 그가 머물던 선원도 문을 폐쇄했지만 혁명의 공간이었던 양곤에서 떨어져 있던 탓에 심각한 상황을 맞진 않았다. 하지만 혁명 두어 달 뒤 상황이 진전된 양곤에 나갔을 때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의 살기등등한 눈 및, 탄창을 고정한 소총 끝에 청 테이프로 붙여놓은 칼의 섬뜩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귀국한 뒤 들었던 한국의 가족들은 그때의 참상을 뉴스나 인터넷으로 찾아보며 가슴 졸였다고 전했다.

요즘 해외뉴스 중 미얀마 민주화투쟁이 가장 이슈다. 4월 1일 현재 미얀마 쿠테타을 일으킨 군부에 의한 사망자가 500명이 넘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겪은 우리나라 국민은 이 뉴스가 유독 신경 쓰인다. 미얀마 쇼우민센터에서 수행하한 인연 탓에 조 작가는 더 가슴이 아프다.

그는 요즘 자신에게 감동을 선사한 착한 눈의 미얀마 시골 사람들이 자주 떠오른다.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라지만 그들이 더 이상 피해당하지 않길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지지 성금을 보내고 친구나 지인들에게 미얀마에 관심을 부탁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안타깝다. 또 미얀마의 불교 지도자들이 현 상황에서 나서줬으면 하고 바란다. 불교가 그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조재익 작.  붓다-꽃이피다 III.oil on canvas.162x130.3cm(2020)

진정한 수행은 ‘쉼’에서 시작

미얀마는 그에게 수행처와 공양만 준 게 아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을 선물했다.

2008년 4월 미얀마의 전통축제인 ‘띤쟌’으로 일주일간 떠들썩해질 것을 피해 미얀마 북부 산악지역에 있는 소도시로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지난 7개월간의 수행에서 진전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기강이 센 수행처를 찾아간 것이다. 50일 간 빡빡한 수행 일정을 마쳤지만 귀국을 3개월여 남겨두고 그는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와 수행에 대한 조급증으로 지쳐갔다. ‘수행법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한다’, ‘처음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가졌던 열의가 식어버린 건가’ 하는 자책감도 컸다. 3개월만 죽을 각오로 용맹정진하면 뭔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또 다른 수행강도가 센 센터로 갈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동행했던 스님의 만류로 처음 수행하던 쉐우민선원에 돌아갔다.

엄청난 태풍으로 쉐우민선원과 그 지역은 황폐하게 변했고, 선원은 사람을 받지 않는다는 임시 방침을 세웠지만 조 작가는 사정사정해서 머물 수 있었다. 쉐우민선원은 쓰러진 나무, 날아간 지붕, 빗물이 고인 건물, 전기가 끊어져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곳으로 변했다. 그런데다 우기가 시작돼 끊임없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선원은 열악한 식사, 연막 소독, 지붕 공사 등으로 수행은커녕 일상생활도 불편했다. 아침에 빗속에서 젖은 음식 탁발하고 돌아오는 것과 비가 개이면 빨래를 하는 것. 그것 외에는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누워있는 것 뿐이었다. 그러기를 두어 달. 어느 날 선원에 돌아다니는 팜플릿을 뒤적이다가 문득 어떤 변화가 있었다. 이해가 확 생겼고, 의식의 전환이 있었음을 알았다. 비 그친 선원 경행로를 걸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소리, 햇빛, 몸의 움직임…. 조금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지만 알아차림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샤워를 마치고 가사 속에 받쳐 입는 속옷을 입으려는데 갑자기 마음이 멈추어버려 그것을 들고 한참이나 서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입는 것’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일어나 겨우 입을 수 있었다. 그즈음 외국에 초빙돼 가셨던 스승이 돌아왔고 그간의 일을 보고 드렸더니 “이제 수행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있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되어 귀국해야 했다. 스승은 “사띠(알아차림)로서 낄레사(번뇌, 망상)를 점검하라”라는 조언을 주셨다. 일 년 만에 밤 비행기로 도착한 한국의 공항에는 아내와 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포옹할 때 느껴진 아내의 더 얇아진 어깨가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문제없이 홀가분하게 살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작업실에 가고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생활. 하지만 한번 피어난 불꽃, 아니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야 알아버린 그것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른 선원에 들러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법문을 수개월 듣기도 하고, 초기불교 수행 중 시체가 썩어가는 것을 관찰하는 백골관(白骨觀)을 체험해보기 위해 시체 해부하는 곳을 몇 번 참관하기도 했다. 깨달았다는 분을 소개받아 2년여 간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는 생활에서 수많은 경계에 부딪혔을 때 즉각 분별을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여실히 확인하여 흔들림 없이 존재하고 싶은 그 간절함을 항상 품고 있었다. 길을 걷거나 밥을 먹거나 얘기하거나 운전하거나 그림 그리거나 TV 보거나, 잠들기 전까지 항상 그랬다.

그러다가 한 단체의 스승을 초빙한 10일 집중수행에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수행과정 중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다가 문득 ‘지켜보는 자’마저 대상으로 놓아버렸을 때 무아에 대한 이해가 일어났다. 기쁨이 올라왔지만 그마저도 대상으로 흘려보냈다. 그는 책에서 늘 읽던 “모든 현상이 무아의 바탕에서 저절로 일어나며 어느 것 하나 항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라는 짐을 내려놓는 자유로움과 후련함이 잠시 함께했다. 아무 것도 마음의 인상에 남지 않아 이때에는 업이고 무엇이고 할 것이 없었다. 다음날 몇십번 읽었던 수행서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새롭게 이해되는 걸 보고 경이로웠다.”

당시의 상황을 블로그에 적은 글이다. 그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있던 몸과 마음은 법의 성품을 항상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과 오염된 견해와 마음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나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라든지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이해되었다. 그는 아무 문제가 없어졌고 아주 홀가분해졌다.

그 며칠이 지나고 평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다시 눈을 드니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는 지금 그냥 작업실 가고, 그냥 그림 그리고, 그냥 밥 먹고, TV보고 히히덕 거린다. 변한 거라곤 ‘가볍다’는 거다. 더 이상 내일이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믿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거다.

조 작가는 어느 순간 자신이 모범답안처럼 신봉하던 작품들이 억지스럽고 관념적이고 선정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 그림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이나 더 어렸을 적에 좋아하고 즐겨 그리던 평화로운 그림, 부담 없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위대한 예술가나 대가들을 동경하며 닮고 싶어하던 노력을 내려놓고 그저 ‘나는 70억 인구 중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꽃’이라고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수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고 무수한 시간을 무심하게 붓질을 하고 나이프로 밀거나 긁는다.

수행의 시간과 수행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을 우리는 5월에 만날 수 있다.

▲붓다-꽃이피다 III.oil on canvas.162x130.3cm(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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