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반만 년의 역사에서 여왕은 세 명뿐이었다. 모두 신라에서 나왔다. 신라가 남성을 제쳐두고 여왕을 둔 것은 골품제와 관련이 깊다. 왕족과 왕족이 결혼해서 태어난 자식은 성골(聖骨)이었다.
왕족과 귀족 사이에 난 자식은 진골(眞骨)이었다. 이하 귀족은 6두품과 5두품, 4두품으로 나누었다.
각각의 품계는 올라갈 수 있는 지위에 한계가 있었다. 신라의 천재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그는 벼슬의 한계가 있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렵자 경주를 떠나 가야산 옥류동에 은거했다. 원효 역시 6두품이었다. 깨달음을 얻었지만 백고좌법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불교계도 성골, 진골 중심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금강삼매경론》을 지어 황룡사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찾을 때 비로소 나만이 할 수 있구나.’ 하였다. 멋진 말이면서 왠지 시대적 아픔이 보이는 듯 하다.

이런 분위기의 신라에 진흥왕 이후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진흥왕의 장자 동륜이 일찍 죽었다. 차남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사생활이 문란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위에 오른 후 4년 만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패륜으로 4년 만에 폐위되었다고 한다. 폐위된 뒤 화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진지왕의 아들은 용춘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당연히 아들 용춘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왕위는 태자 때 죽은 동륜의 아들이 계승하였다. 그가 진평왕이다. 오래 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사후 왕위를 이은 이가 선덕왕이다. 명분은 성골이 없어 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진지왕의 아들 용춘은 성골이었다. 얼마든지 계승할 수 있었지만 넘겨주지 않은 것이다. 그의 아들은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 김춘추이다. 그 역시 성골이었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조부의 패륜과 아버지의 실각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나 그의 처남은 신라 제일의 장수 김유신이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지만 왕이 되지 못한 사람과 신라의 무력을 손에 쥔 사람과의 연합은 폭발하기 직전의 휴화산 같이 긴장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선덕왕이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신하들은 점점 김춘추와 김유신 편에 서고,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 역시 김유신의 부하가 아닌가. 그들을 신하로 데리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을 드러낼 수도 없앨 수도 없었다. 실제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인 ‘칠숙의 난’은 여왕의 즉위를 저지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여왕이 즉위하자 주변국도 깔보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노골적으로 병사를 일으켜 침략하였다. 재위 2년(633)에 백제의 무왕이 서곡성을 침공하여 13일 만에 함락하였다. 이곳은 전북 무주에서 경북 성주군으로 이어지는 산성이었다. 백제 땅에서 신라 경주로 이어지는 가장 짧은 거리였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 적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 경주 석장사지 ⓒ 이창윤

돌아가신 부모의 신령에 의지하려 영묘사 창건

안으로는 왕위가 불안하고 밖으로는 적과 대치하는 여왕의 선택은 불교였다. 즉위하자마자 영묘사(靈廟寺) 창건을 명하였다. 글자대로 보면 신령스런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찰이었다. 누구를 위한 사당이었는지는 분명하다. 가까이는 아버지 진평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김씨를 위한 원찰일 것이다. 좀 더 범위를 확대하면 태자의 위치에 있다가 죽은 조부 동륜도 포함될 것이다. 누구도 믿기 어려울 때 직계존속의 신령에 의지하고픈 여왕의 심정이 보인다.

그렇게 시작된 불사는 양지(良志)의 지휘아래 선덕여왕 4년 완성되었다. 승려 양지는 선덕여왕 때 고승이었다. 그의 조상과 고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여왕 때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신라 고승 대부분이 왕족인 것으로 볼 때 그리 좋은 가문의 출신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신통력 하나만은 뛰어났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신도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 왔다. 이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 하였다. 그의 행적에 신이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양지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통달하여 영묘사의 장륙삼존상, 천왕상, 전탑의 기와 등을 만들었다.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 현판을 직접 썼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선정에 들어 어지러운 마음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행했다. 그의 명성을 알고 있는 성 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그때 대중들이 부른 노래가 다음과 같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슬픔 많아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삼국사기》에 영묘사 남쪽에서 영성제(靈星祭)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농사에 중요한 별자리에 대한 제사이다. 그래서 신령(神靈)을 모신 묘당(廟堂)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제사용으로 지은 것이라면 명칭이 달라야 한다. 단(壇), 사(祠), 또는 사(社)를 붙이는 것이 맞다. 영묘사는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다. 제사야 지낼 수 있지만 성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왕위에 오른 자식이 부모를 위해 지은 사찰이니 어떠했을까. 당연히 크고 화려했을 것이다. 조선조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전우(殿宇)가 삼층인데, 웅장하고 화려함이 보통에 뛰어났다. 신라 시대의 탑묘(塔廟)는 지금 모두 허물어졌으나, 이 전(殿)만은 완연하게 예전과 같다.”

전각은 삼층이었고 그 안에 모신 불상은 장육존상이었다. 황룡사 역시 진흥왕 때 장육존상이 조성되었다고 하니 영묘사의 규모가 나라의 사찰인 황룡사에 버금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묘사는 뒤에 성전(成典)사원이 되었다. 중요한 사찰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다. 사찰마다 왕실에서 파견된 관리가 운영하였으니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 영묘사지에 근래에 세워진 흥륜사지. ⓒ 경주시관광자원영상이미지

영묘사 위치는 어디일까

고대 삼층 건물의 위용은 지금 눈높이와 같지 않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이이다. 경주 땅에서 그 높이의 건물은 월성, 황룡사, 그리고 영묘사뿐이었다. 그런 곳이었기에 신라인들은 전생부터 있었던 7곳의 절터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다.

그 7곳은 첫째 금교(金橋)의 천경림으로 지금의 흥륜사, 둘째 삼천기로 지금의 영흥사, 셋째 용궁의 남쪽으로 지금의 황룡사, 넷째 용궁의 북쪽으로 지금의 분황사, 다섯째 신유림으로 지금의 천왕사, 여섯째 사천(沙川)의 끝으로 지금의 영묘사, 일곱째 서청(婿請)의 밭으로 지금의 담엄사이다. 이런 곳들은 전겁(前劫) 시대 절터이기 때문에 불법이 멸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영묘사는 여왕의 시대를 넘어 신라 말까지 사격이 유지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경주 계림에서 홀로 남아 그 장엄함이 으뜸인 승지라고 찬탄되었다.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영묘사에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영묘사는 월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창건 시 당우는 삼층 전각만이 아니라 여러 개가 있었으나 이 무렵 다른 전각들은 훼손되고 삼층 전각만 남았다.”

앞서 세종실록 내용까지 이어보면 신라 시대, 고려 시대, 그리고 조선 전기까지 영묘사는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볼 수 없으니 조선조 큰 병란으로 폐사되었고, 그 후 민초들의 밭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5월 월성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서 20여 개의 주춧돌과 중방돌 등을 발견하였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관계자들은 이곳을 영묘사 터로 추정하고 국보로 지정하도록 중앙에 상신하였다. 발견된 절터를 영묘사 터로 단정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근처에 약 십년 전까지도 느티나무 숲이 남아 있었고, 둘째 지금까지도 이 근처에 연꽃 둠벙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영묘사 터는 원래 큰 못이었다. 이곳을 두두리(豆豆里) 대중들이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셋째 매월당 김시습이 영묘사의 목탑 위에서 시를 읊었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발견된 절터에 지금까지도 목탑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추춧돌과 대웅전 중방돌의 수법이 삼국시대의 것이라는 판단을 종합해보면 영묘사가 맞다고 당시의 신문기사가 전한다.

하지만 영묘사는 복원되지 못했다. 오히려 흥륜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그런데 지금 경주공고 배수로 공사 중 륜(輪)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을 흥륜사 터로 보고 있다. 영묘사 터에는 흥륜사라는 절이 들어섰고, 흥륜사 터에는 경주공고 학교가 있는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이 영묘사에도 보이고 있다.

▲ 경주 흥륜사지 목탑지로 알려져있지만 영묘사 목탑지이다. ⓒ 문화재청

영묘사에 나타난 암시로 위기를 벗어난 여왕

영묘사는 여왕이 부모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이런 여왕의 바람처럼 영묘사는 신령스런 효험이 있었다. 여왕에게 변란의 조짐을 암시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영묘사에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였다.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두 각간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또 백제 병사 1천 2백인이 오자 역시 쳐서 모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하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개구리 일을 보고 그렇게 지시하였으며, 적의 내침에도 놀라지 않았습니까?”

여왕이 대답하였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다.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일로 군신들이 여왕의 슬기로움에 감복하여 더 이상 얕보지 못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 여왕이 창건한 영묘사에 개구리가 나타난 것은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적의 침입을 알아챈 여왕의 지혜도 범상치 않다. 한갓 전해지는 이야기, 흥미를 주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간절함이 보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여왕에게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사심이 없던 고승 양지를 등용하여 영묘사를 창건하고, 돌아가신 선망부모의 은혜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 왕위를 지켜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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