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행하는 수행, 간경, 염불 등등이 불자의 실천이고 그것이 곧 불교의례"라고 하는 이성운 교수. 이 교수는 불자들에게 '나무붓다야'라고 인사하며 칭명하는 운동을 제안한다. 사진 이창윤.

“나모붓다야”

그는 언제나 이렇게 인사한다. 전화 통화해서도, 대면으로 만나서도, 심지어 문자메시지를 할 때도 그렇다. 그리고 본인을 소개할 때도 ‘나모붓다야’ 운동에 대해 꼭 언급한다. 붓다의 명호를 부르며 예경하여 나의 몸과 마음이 붓다와 하나이기를 기원하는 이 인사를 불교운동으로 퍼뜨리자고 권유한다.

그의 나모붓다야 운동은 대승불교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 한 분이던 것이 대승불교에서 수많은 불보살이 출현했고 신도들은 자신이 믿는 불보살에 예경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라가 다르고 믿는 불보살이 다르면 불자라 하더라도 인사조차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불교전통을 부정하지 않은 가운데 하나의 인사, 그리고 인사로 끝나지 않고 염불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 운동이 탄생했다.

그의 나모붓다야 칭명운동을 보고 어떤 이는 ‘사이비종교’ 만드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그는 “붓다를 나의 스승으로 삼고 의지하며 깨친 분의 지혜·자비와 함께 하기를 발원하는 것이 왜 사이비인가?”라며 “불교가 종파에 따라 다르고, 자신의 추구하는 바에 따라 예경하는 대상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그 뿌리는 ‘붓다’이고 우리가 공부하는 처음과 끝이 ‘붓다’이기 때문에 ‘나모붓다야’는 세계불교도를 통합하는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동방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의례학과 교수이자 붓다아카데미 운영자, ‘나모붓다야’ 운동가인 이성운 씨. 그는 본인을 실천철학자라고 소개한다.

매일 ‘일삼오공(一三悟空)’ 제안

붓다아카데미는 ‘붓다의 가르침과 그 의례문화를 공부하고 연구하며 수행하는 불자들의 배움터’이다. 2019년 이 교수가 대표 발기한 단체이며, 이는 2010년 스님들과 재가연구자들이 함께 출범한 불교의례문화연구회에서 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붓다아카데미는 50여 명의 진성 회원들이 활동하는데, 매주 의문강독회, 초기경전 읽기, 불교문화 아카데미 등 불교공부를 하고 매월 첫째 금요일에는 설재포살회를 연다. 또 연 2회의 의례학술회, 회원들의 생일이나 육순, 칠순 등에 수시로 예수회를, 상달에는 경산수륙회를 열며 〈의례문화〉를 발간한다.

그는 붓다아카데미에서 요즘 세 가지 실천을 제안한다. 첫째는 앞에서 얘기한 나모붓다야로 인사하기이다. 둘째, 나모붓다야 칭명을 하루 3회 실천(염불)하고, 붓다의 말씀인 경전을 읽고(간경), 조용히 마음을 멈추고 일체(나와 대상과 가르침)를 사유하고 관찰하며(명상), 계정혜 삼학을 실천한다. 셋째, 나와 세상의 일체에는 고유의 속성이 없음을 깨친다. 나모붓다야 칭명을 일념으로 하며,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며, 그것으로 공(空)을 깨친다고 해서 일명 ‘일삼오공(一三悟空)’으로 칭한다.

이 교수는 붓다아카데미 밴드 모임에 거의 매일 글을 올린다. 그는 모든 것이 학문으로 사유할 거리이고, 그것은 불교의 실천으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최근 그가 올린 글에는 불교의 재일에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문제를 등장시켰다.

“불교의 재일은 불자들이 사찰(불원과 승원의 집합체)에 방문해 한 달 동안 행했던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다짐하며 붓다의 자비원력에 의지해 그 길을 지침 없이 가고자 하는 의례이다. 이때 재일의 제일 특징인 오후불식을 행해야 한다. 그렇지만 재일에 절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으면 절에 오는 신도가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진단하는 분들이 다수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찰에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은 지 근 일 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사찰에서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져가고 있으므로 이참에 재일에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보는 분들도 계실 수 있다.”

이 글의 제목은 ‘경험과 합리의 변증법’이다. 철학에서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나누고 반대의 개념으로 읽는다. 이 교수는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그것 너머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평소에 하고 싶던 재일의 점심공양을 끌어와서 말이다.

“재일에 점심을 제공하지 않으면 여러 정황으로 봐서 안 된다는 경험 우선주의와 재일에 음식 제공을 하지 않았지만 큰 문제가 없고 하니 앞으로도 재일에 점심을 제공하지 않고 재일의 본래 의미인 오후불식도 실천하도록 하자는 합리적인 사고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재일에 점심을 제공하지 않으면 당장 절이 운영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험 제일주의와 여러 정황 등으로 그와 같은 재일의 점심 문화가 이어왔지만 점심 제공을 하는 것이 비불교적임을 알려줄 수 있는 계기가 역질로 인해 조성되었으니 불교의 본질 회복을 위해 나서야 하지 않나 하는 합리주의가 조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경험이나 합리냐 하는 이분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본질을 어떻게 회복하느냐를 제일 관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한쪽에 치우쳐 고집하지 말고 경험도 합리도 넘는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게 그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이 교수는 ‘불교의례’를 실천의 한 축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행하는 수행, 간경, 염불 등등의 것이 불자들의 실천이다. 그는 불교의례를 광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볼거리, 들을거리로 대변되는 현재의 문화재 중심 의례가 성행하는 것을 경계한다. “의례는 믿음으로 성립되며, 믿음이 없으면 형식만 남는다.”고 했다. 불교 교학과 선리학을 중심으로 탄탄한 공부가 되지 않으면 그가 이런 의례에 관한 관점을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불교미망사’라는 별명 얻어

이성운 교수는 의례학 박사를 받은 건 불과 10여 년 전이다. 하지만 그는 30년간 의례를 연구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가 불교를 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수운 최제우, 손병희 선생을 존경해 민족운동에 관심을 갖고 천도교를 찾다가 실패하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불교다. 원각회에서 한탑 스님의 설법을 들은 날이 너무 강렬한 느낌으로 남아 불교에 빠져버렸다. 정기적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서울불청 법회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대여섯 번은 각종 법회에 쫒아 다녔다. 그때부터 이미 애늙은이처럼 불교를 접했다.

30대에 정우서적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알고 지내던 스님들에게 불교의례에 필요한 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평소 법회 때마다 접하던 법요집을 출간 목적으로 자세히 보니 적지 않은 오류가 보였다. 문제를 제기했지만 스님들은 바꾸지 말고 그냥 전처럼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때부터 자신의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니 30년 전부터 변방의 학자처럼 연구하고 지적해왔다. 그래서 ‘미망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인도의 고대 6학파 중 ‘미망사학파’는 의례해석학파였다. 정통인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였고, 미망사학파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파였던 것이다.

“불교는 구전심수(口傳心授)가 많아요. 입으로 하는 걸 마음으로 전해줬으니 가까우려면 한없이 가깝고 멀려면 한없이 멀어 의례가 왜곡 또는 변용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하는 연구자가 있어야 했던 것이에요.”

그는 ‘미망사’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의례에 대해 파고들어 연구하고 따졌다. 그러다보니 누군가 ‘공부를 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그래서 2012년 ‘한국불교 의례체계 연구’로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역사 분야의 전공자는 많이 있어도 불교의례 분야는 그가 개척자였다. 의례는 교리를 실천하는 건데 실천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보니까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요즘이야 영상물로 기록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설행된 것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전해진 것뿐이었다. 그래서 같은 의례라도 너무 달라졌고 연구가 어려운 이유가 되었다.

"의례는 교학보다 높은 단계"

불교의례학의 태동은 봉선사 월운 스님이 중앙승가대에서 의례를 가르치다 보니 자료 삼을 책이 필요해서 1991년 발행한 《일용의식수문기》와 세민 스님이 1993년 발행한 《한국불교의례자료총서》(전 4권) 등으로, 이들이 한국의 불교의례학 초기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불교의례자료총서》에는 74편 전통불교의례가 들어있고, 당시 동국대출판부에서 나온 《한국불교전서》에 들어있지 않은 자료를 모은 것이라 더 의미가 있다.

그래도 1970년대 후반에 의례학이 생긴 일본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다.

이 교수는 “종교의 3요소는 교조, 교리, 의례”라며 “의례는 교조의 신념을 실현하는 그릇”으로 표현했다. 그 외에도 의례를 “붓다에게 다가가는 형식이고 붓다를 모르는 이들을 구제하는 형식”이라고도 했다.

그는 교학보다 의례를 더 윗자리에 놓았다. “교학은 마음을 알고 닦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의례는 마음을 닦고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나만 아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알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는 데서 끝나는 게 교학이라면 부처가 되는 과정을 공부하는 불학(佛學)에 교화(敎化)를 합한 것이라 했다. “나의 완성과 타자의 완성을 이루는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신념의 실천이 의례”라고 주장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든 행위가 다 의례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시식·불공하는 것을 의례라 생각하며 형식 자체만 보고 별게 아니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염불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삶이 바뀌도록 인도하려면 굉장히 강한 내적 관력(觀力), 즉 살핌의 힘이 있어야 한다.”며 “관력이 없으면 의례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 교수 자신이 어릴 때부터 불교공부를 했는데 알고 보니 교학은 ‘내 마음 닦는 것’이고. 의례는 그것을 아우르는 더 큰 개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의례는 멋있고 공부할만한 것”이라며 매일같이 하는 공부에도 늘 신나있다.

‘송주’ 전통 되살아나길 기대

붓다를 존경하고 그 가르침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 보니 그것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교수는 크게 몇 가지 의례의 잘못된 선례를 비판했다.

재를 지낼 때 번(幡) 하나도 불보살이나 신중으로 화현된 것이라 그 분이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자리해야 한다. 그런 장엄 하나하나가 굉장한 사유철학이 들어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많은 절에서 보기에 좋은 쪽으로 마구 갖다 걸다보니 바깥을 보고 있어야 할 호외신중이 안에 들어와 있는 등의 실수를 한다. 그런 것을 이성운 교수가 지적하면 많은 이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잘못을 시정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이 교수는 “질서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영산재는 49재이며, 핵심은 법화경 염송의식인데 현행 의식은 두 시간 안에 끝나니 본래의 뜻을 펼치지 못한다. 단순히 변재삼보(遍在三寶)를 청하는 의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니 경전을 읽는 행위는 종교적인 것으로 보여져, 보고 들을거리 위주로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이렇게 종교의례가 왜곡·변질되는 게 이 교수는 너무 안타깝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승가에서 송주(誦呪)가 사라진 현실이다. 송주란 게송(偈頌)이나 다라니(陀羅尼) 등을 독송하는 것이다. 17세기 명나라 말기에 편집된 의례집 《선문일송(禪門日誦)》에는 많은 다라니와 경전을 외는 과정이 수행으로 나온다. 송주하며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배고픈 중생에게 먹을 것 주는 의례행위를 통해서 선으로 가고자 했다. 중국불교는 지금도 매일 하는 일과로서 송주를 하며 일본불교는 ‘근행식(勤行式)’이라는 말로 매일 모여 송주를 한다. 우리도 최소 50~60년 전까지는 조모송주라며 일과로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송주를 폄하하고 참선을 최고로 치고 있다.

“한국 종파불교 스님들이 적어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맞는, 매일 반복하며 예외가 없이 참석하는 수행이 있어야 하는데 겨우 10분이 채 안 되는 예불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조석예불은 말 그대로 전각의 불보살님께 1배나 3배를 올리면 됩니다. 그것 말고 함께 모여 적어도 능엄주라도 매일 읽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깨달은 부처님께 경전을 읽어드리는 게 맞느냐고 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부처님 앞에서 읽으며 이렇게 공부한다고 일러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입을 통해 읽어지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다시 듣는 과정이 바로 송주입니다.”

눈치 안보고 실천하는 학자

그 외에도 한국불교가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을 의례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부분을 이 교수는 지적했다. 그가 무조건 딴지를 건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얼마나 불교를 사랑하고 부처님을 존경하는지 알게 되었다. 절절하게 믿기 때문에 실천의지가 강하고, 의례를 실천으로 보니 더욱 의욕이 타오르는 것이다.

그에게 ‘나모붓다야’라고 인사하고 나오면서 무언가 불교를 실천하는 용기를 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실천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구나 그 실천이 기존의 것과 다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보면 이성운 교수는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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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운 교수는 동국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로, 대한불교조계종 의례위원회 실무위원, 불교 의례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을 맡았으며 동국대학교·금강대학교·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고 아울러 붓다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불교의례, 그 몸짓의 철학》, 《한국불교 의례체계 연구》, 《천수경, 의궤로 읽다》, 《삼밀시식행법해설》(공저) 등 단행본을 출간했다. 논문으로는 〈금강경 ‘우리말화’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  〈의식과 의궤의 불리성〉, 〈불교 의례의문의 명칭에 대한 고찰〉, 〈한국불교 일상의례의 명칭 문제〉, 〈영산재와 수륙재의 성격과 관계 탐색〉, 〈현행 천수경의 구조와 의미〉, 〈현행 수륙재의 몇 가지 문제〉, 〈수륙재의 한국화에 대한 일고찰〉, 〈치문현토와 번역의 연관성 연구〉 등 수십 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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