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뜬금없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心)이 진심(眞心)인가, 망심(妄心)인가?” 하고 물었다. 마음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이 찾아와 일체유심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마음(心)’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는 것이다.

“하나인 마음인데, 굳이 진심과 망심으로 나눈다면 망심이죠.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자리에 짓고 부수는 게 있겠습니까? 중생심이, 한 생각이 일어나야죠. 일념(一念)이 만리성(萬里城) 아닙니까?”

차를 바꾸면서 생긴 일

나는 몇 달 전에 25년간 타온 차를 바꾸었다. 서울에 살 때에도 그 차는 이미 환갑 진갑을 넘겼지만 회사 앞에 있는 서비스센터에서 정비를 잘 해줘서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안성 들판에 살면서 크고 작은 고장이 자주 일어났다.

들판의 높은 습도는 늙은 차의 건강에 좋지 않았다. 집 근처에 한 공업사가 있어 단골이 되었으나 기술이 부족하고 일이 치밀하지 못하여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를 망가트리는 일이 종 종 일어났다. 노쇠해졌는데 돌봄 이 부족하니 한해 한해 차가 나빠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근년에는 매년 꽤 많은 수리비를 지출해야 했고 차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차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제 차를 바꾸라!’는 조언을 들을 때마다 “몸을 바꿀 날도 멀지 않았는데 그 때까지 고쳐 타야지. 저 차보다 이 몸 을 먼저 폐기하려 해.”하고 대꾸하 곤 했다.

그런데 지난여름 브레이크를 밟으면 ABS가 자주 작동했다. 그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단골 공업사에서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비스센터에 갔더니 기사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뒤 차축이 휘어져 바퀴가 아래로 벌어져 있잖아요? 이 차의 공통된 문제 에요. 수리할 수도 있지만 수리비가 차 값만큼 나와요. 이제 폐차하세요.”

결국 폐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차 없이는 살기가 어렵다. ‘이 제 살날도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또 ‘차로 위신을 세울 일도 없다’는 생각에 중고차를 사기로 했다. 친지가 한 거래상을 소개해주었고 그렇게 해 서 11년 된 차를 230만 원에 구입했다. 그 차를 몰며 이 전에 몰던 차는 ‘경운기’와 다름없었음을 알았다. 일 년에 100만 원 가까운 수리비를 부담하면 서도, 가다 서지 않을까 하는 다소의 불안감이 있었음에도 그 차를 버리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작년 한여름에 받았으니 이제 반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다.

방향이나 열정이 없으니 ‘고집’이 아니다

난 고집이 세다. 아내를 위시해서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말한다. 그래서 나도 내가 그런 줄 안다. 내가 최가에 곱슬머리인 것도 거부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20년 넘게 한 차를 타는 것도 고집이 세서 그렇다고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5G의 시대에 2G의 011 전화를 쓰는 데 ‘그만 고집부리고 바꾸라’는 충고도 종종 듣는다.

정말 그런 것이 고집일까? 쓰던 것을 계속 쓰는 것은 힘이 들지 않지만 바꾸는 것은 힘이 든다. 사실 나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그저 쓰던 것을 쓸 뿐이다.

고집이란 무엇인가? 흐르는 물을 애써 막고 있는 것, 군중에 떠밀리면서도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고집이 아닐까? 오를 수 없는 산을 오르려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려 하는 것이 고집이 아닐까?

고집은 방향이 있고 열정이 있다. 또한 행동을 지속시키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차를 바꾸는 것은 ‘큰일’이다. 폐차하고 차를 선택하고 돈을 준비하고 등록하고 네비게이션과 하이패스를 옮겨 달고…. 그 얼마나 일이 많은가? 011 전화번호를 바꾸는 일도, 차를 바꾸는 일에 비할 수는 없지만 역시 일은 일이다. 모두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바꾸는 것이 실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이제 바꾸자’ 하는 한 생각(一念)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이 없으면 그대로 지내게 된다.

언젠가 어느 개그맨 부부가 집의 냉장고를 정리하는 영상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품을 꺼내며 연신 놀라고 감탄했다.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식품도 많았다. 그를 지켜보는 한 패널의 말이 걸작이었다.

“어느 집이나 냉장고는 박물관이에요!”

그렇다. 특히 냉동실이 문제다. 아내가 관리하는 서울 집의 냉동실도 빈틈이 없다. 홀로 살던 어머니 집의 커다란 냉동실도 그랬다. 거기에도 한 생각, 즉 ‘이제 정리하자. 먹을 건 먹고 오래된 것은 버리자.’ 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그것 역시 고집이 아니다. 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삶은 ‘한 생각’의 연속

세상을 사는 데는 참으로 한 생각이 중요하다. 그 한 생각이 하늘의 즐거움을 가져오기도 하고 지옥의 고통을 가져오기도 한다. 참으로 조심스럽다.

돌이켜보면 삶은 한 생각의 연속이었다. 배우자를 골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처자와 함께 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직장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나에게 떨어진 일을 하려면, 그리고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승진하려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 많은 생각이 일어날 때는 거의 항상 ‘머뭄’이 있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알았지만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나’, ‘나의 가족’이 있었고 이해득실이 있었다. 참으로 많은 인(因)을 심었고 업(業)을 쌓았다.

내 나이 칠십을 바라보게 되자 부모와 처자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이제 생각을 쉬어도 지낼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생각을 쉬는 것은 어떨까? 다행히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사가 있다. 천동각(天童覺) 선사다.

꼼짝 말아라. 천 년 묵은 종이쪽이 약방문에 맞느니라.

莫動著 千年古紙中合藥

 

최운초(돈명)|《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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