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심초석.

황룡사가 세워지는 과정

경주는 천년 동안 이어온 신라의 도읍지이다. 당연히 군주가 지낸 왕궁이 있었다. 지금은 전각들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터는 월성(月城)으로, 달처럼 휘어진 모습이어서 그렇게 불렀다. 이곳에 궁궐이 세워진 것은 5대 파사왕 22년(101) 2월이었다. 신라가 세워진 후 158년 정도이니 아직 부족국가였다. 국력에 비례하듯 왕궁 역시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은 17대 내물왕 이후이다. 23대 법흥왕을 지나 24대 진흥왕에 이르면 제법 백제와 고구려에 맞설 만큼 힘이 커진다. 국력이 커지면 왕권도 강화되는 법이다. 법흥왕의 힘겨운 노력으로 다시 중앙집권제가 자리를 잡았고, 이를 계승한 진흥왕 역시 삼국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강력한 왕권이 절실하였다. 국민을 자애롭게 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가통치에 백성이 따라주는 것도 중요했다. 당시에는 군주의 위엄을 나타낼 수 있는 왕궁의 건립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진흥왕은 즉위 14년(553) 지배력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왕궁을 크게 건립하고 싶었다. 이때는 백제와 협공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중국과의 교섭로를 확보한 무렵이었다. 그 해 2월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 옆 넓은 뜰에 새로운 왕궁을 건축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뒤에 분황사가 생기자 위치는 월성과 분황사의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조성 도중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 이것을 괴이하게 여기고 생각을 바꿔 사찰을 조성하였다. 이름을 황룡사로 하였다. 때론 황제를 뜻하는 황(皇)을 붙이기도 하였다. 진흥왕 27년(566) 2월에 완공되었으니 무려 14년이 걸렸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 완공을 진흥왕 30년(569)으로 적고 있다. 마지막으로 황룡사 담장을 두르고 17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의 경우 황룡사 주요 전각이 완성된 시기를 기록했다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담장을 포함한 사찰조성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을 의미한다.

황룡사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 동안 진행된 발굴조사에 의하면 크기가 동서 288m, 남북 281m이다.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로 보면 초기 황룡사는 중앙에 1탑 1금당 형식이었다.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로 이어진 회랑 끝에 승방을 배치하였다. 이후 장육존상을 안치하기 위해 대형의 금당이 조성되었고, 선덕여왕 때 자장에 의해 목조 9층탑이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경덕왕 13년(754) 무게 50만 근의 황룡사 대종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황룡사였지만 화마(火魔)를 피해가지 못했다.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3차 침입 때 전각과 당우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은 주춧돌과 좌대만 남아 있다.

진흥왕 때 삼국의 상황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이후 중국의 견제를 심하게 받았다. 그러자 아들 장수왕은 전략을 바꿔 한반도 쪽으로 내려왔다. 즉위 15년(427)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자 당황한 것은 백제였다.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공주로 천도한 이후 늘 북진정책을 첫 번째로 삼았던 백제와 고구려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국력이 약했던 백제는 고구려 남하를 신라와 동맹으로 막고자 하였다. 신라 역시 혼자 힘으로 고구려를 막아낼 정도의 군사력은 아니었다.

433년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이 서로의 안전을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것이 나제동맹이다. 상호 지원군을 파견하는 군사적 동맹이었다. 실제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할 때 신라가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신라에 침입할 때는 백제가 지원군을 파견하는 등 동맹체제가 유지되었다.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백제의 동성왕이 즉위 15년(493) 신라 귀족의 딸과 결혼하는 혼인동맹으로 발전하였다.

▲ 경주 황룡사지 금당지.

그러나 긴밀했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 5세기 말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했으나 백제는 신라에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6세기 초에 이르면 백제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주요 국경인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는 등 다소 대립적 관계로 치닫게 되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가야지역에 대한 양국의 대립이었다.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완충적인 지역이었다.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자 백제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른 가야의 소국으로 하여금 신라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는 등 신라에 대한 적대 행위가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도 548년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움을 청하자 진흥왕은 군대를 보내주었다. 그로 인해 양국관계는 잠시 개선될 수 있었다. 3년 후 551년에 신라와 백제는 한강유역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553년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하자 양국관계는 다시 소원해졌다. 이에 백제의 성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전투 중 죽으면서 양국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진흥왕의 고민과 장육존상 조성

신라는 백제와 적이 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고구려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금의 함경도 지역을 빼앗고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 순수비를 세웠다. 순수비는 앞서 정복했던 한강 유역과 가야 지역에 세운 창녕(昌寧)과 북한산(北漢山) 순수비와 합쳐 4개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지속되는 전쟁은 인간의 심리를 극도의 공포로 몰고 간다.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느끼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죽어가는 신라의 젊은이가 많아지면서 진흥왕을 원망하는 여론도 높아졌다. 백제와 연합해서 평화롭게 지내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군주를 미워하였다. 전쟁에 나간 자식이 죽은 부모들에게 영토 확장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진흥왕은 왕궁을 새로 짓다가 이를 황룡사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월성은 예전보다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대규모 공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적인 공사가 많다는 것은 국가 재정의 소비를 의미한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보면 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낭비한 후 멸망한 왕조가 존재한다. 대규모 공사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진흥왕의 고민이 많아졌다. 반전이 필요하였다. 백성들에게 전쟁을 해서 지켜야 하는 신라만의 가치가 필요하였다. 그렇게 해서 제시된 것이 ‘신라는 불국토’라는 인식이었다. 이것이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다. 그런 사상을 만들기 위한 스토리가 필요해서 불교와의 인연과 인도의 아쇼카왕을 등장시켰다. 이제 그런 이야기가 상영될 무대가 필요하게 되었다. 진흥왕 35년(574) 황룡사에 장육존상을 조성하였다. 나제동맹이 해체된 이후 신라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진흥왕의 전략이 실행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황룡사를 창건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하곡현 사포(지금의 울주군 곡포)에 큰 배가 닿았다. 군졸들이 배를 검사하니 철과 금이 실려 있었고 편지가 함께 있었다. 그 글을 보니 인도 아쇼카왕은 자신이 직접 부처님을 뵙고 공양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삼존불을 조성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세 번이나 실패하자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분 그리고 석가 삼존상의 모양을 배에 실어 보내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다. 배는 남섬부주의 16 대국(大國)과 500 중국(中國), 1만 소국(小國), 8만 촌락을 돌아다녔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최후에 신라에 이르렀다.

관리가 장계를 갖추어 왕에게 아뢰니 사자를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시원하고 높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삼존불을 안치하였다. 금과 철은 경주로 옮겨와 진흥왕 34년(573) 3월 장육존상을 한 번에 조성하였다. 장육이면 5m에 이르는 크기이다. 무게는 3만 5007근이며 황금이 1만 190분이 들었다. 그리고 두 보살은 철이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0분이 들었다.

이 불상을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인도의 통일 군주인 아쇼카왕이 해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을 신라의 진흥왕이 완성함으로써 자신감은 물론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미래의 희망을 주었다.

진흥왕,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어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신라이니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그런 불국토가 지금 적들에 의해 침략 받고 있는데 누가 지킬 것인가. 불국토에 사는 신라인들이 지켜야하지 않는가.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진흥왕의 기획과 신라 왕족들의 연극이 보이는 듯하다. 아쇼카왕은 기원전 250년 무렵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왕이다. 진흥왕이 장육존상을 조성한 것이 574년이다. 대략 800년이 넘은 시간이다. 아무도 없는 배가 이 기간 동안 항해하는 일은 상상 속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아쇼카왕이 쓴 편지는 인도의 언어였을 터인데 신라의 누가 읽을 수 있었을까?

황룡사 장육존상 이야기는 설화이다. 비논리적인 내용이라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진흥왕에게 필요한 것은 장육존상 조성을 통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정황을 유추해 보면 진흥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의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첫 번째가 앞서 살펴보았던 신라는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곳임을 강조한 불연국토사상이다. 그 결과 신라인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일임을 자부하였고, 싸움 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다하면 바로 부처님의 세계에 왕생한다는 신앙적 귀의처를 갖게 되었다. 이런 신앙적염원은 국민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단결심을 이끌어내 건국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100년 뒤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자량이 되었다. 대업에는 중국과의 외교적 노력도 중요했지만 당사자들의 정신적 자세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두 번째는 신라 왕족은 부처님의 후손임을 염원한 것이다. 진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군주들은 ‘진(眞)’자가 들어가는 왕호를 많이 썼다. 신라인들은 부처님이 태어난 석가족을 참다운 종족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진종(眞宗)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석가족의 신성함을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 신라의 왕족 역시 부처님의 후손으로 우수한 혈통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조치였다.

초기 신라의 왕위계승은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박 씨와 그들의 사위였던 석씨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 씨의 경우 13대 미추왕이 처음이었다. 다시 박 씨와 석씨로 돌아갔다가 17대 내물왕 때 다시 김 씨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만으로 세습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계승이 진흥왕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 씨, 석 씨와 다른 차별성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인도 아쇼카왕이 보낸 배가 수백 년이 지난 다음 신라에 온 것을 설화로 엮어 김 씨 왕족의 존귀함을 나타낸 것이다.

진흥왕 이후에도 신라 왕실의 이름에서 석가족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진평왕의 이름은 석가모니 부처님 아버지 이름인 ‘백정(白淨)’이며, 진평왕 부인의 이름은 마야이다. 선덕여왕의 경우 경전에 나오는 동방세계의 부처님인 ‘선덕여래’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덕여왕의 이름인 ‘승만’은 《승만경》에 나오는 승만부인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김경집 | 진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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