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비하르주(Bihar州)에서 11·12세기  비구니사원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인도 동북부의 비하르주(Bihar州)에서 11·12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기존의 사원 유적과는 달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에서 발굴된 최초의 사원이라는 점, 또한 최초로 발굴된 비구니사원이라는 점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원은 갠지스 계곡 근처인 라키사라이 지역 ‘랄 파하리’라고 알려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날란다 대학이 있던 파트나와 부처님 당시 법문이 이루어졌던 영축산으로부터 약 40km, 그리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로부터는 약 70km 떨어진 곳이다.

유적지 발굴 작업은 2017년 비하르주 수상인 니티쉬 쿠마르에 의해 시작되어 비하르주 정부 예술문화청소년부에 소속된 비하르유적개발협회와 서벵갈의 비스바-바라티대학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발굴단을 이끌었던 아닐 쿠마르 박사는 이 지역이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언급하며 이 사원이 대승불교의 주요 중심지였을 거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지역은 이전에는 ‘크리밀라’로 불린 곳으로 팔라왕조 영어번역자유기고가때 교역의 중심지이자 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했다. 현장 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이 지역에 수많은 사원이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도 재세 시에 이곳에 몇 차례 머무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팔라왕조는 8~12세기에 북인도의 갠지스 지역과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 등의 일부 지역을 통치했던 왕조로 이 시기 이 지역은 교역과 문화가 발달하고, 특히 불교가 융성했다. 이 비구니사원도 팔라왕조의 말리카 왕비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발굴된 유적지는 여러 면에서 많은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이 사원이 이 지역에 바하르라는 지명을 부여한 많은 ‘비하라(석굴사원)’ 중 주(州) 최초로 발굴된 비하라라고 아닐 쿠마르 박사는 말했다.

박사는 덧붙여 “이 사원의 이름은 스리마다르마비하릭 승가회(Srīmaddharmahāvihārik āryabhikṣusaṅghasya, the council of monks of Śrīmaddhama vihār) 이며 이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진흙 인장이 발견되었다.”고 설명했다.

방 문·내부 연결 구조 등 비구니사원 추정 근거

▲ 공양물로 추정되는 작은 불상들이 발견되었다.

날란다와 텔하라, 비크람쉴라 등에서 발견된 사원들의 이름은 비하라군(群)으로 이루어진 ‘마하비하라’로 호칭되며 동부 인도의 비문과 건축물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반면 이번에 발굴된 비하라 규모의 사원은 현재까지 비하르주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찰이 비구니사원이라고 추측되는 이유는 우선 ‘비자야쉬르 바드라’라는 이름의 비구니가 주지로 주석했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금속 팔찌들이 발견되었고 지금까지 발굴된 대부분의 유적과는 달리 모든 방들에 문이 있다는 점, 방들은 내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등이 이 곳이 오직 비구니만을 위한 시설이었거나 혹은 비구들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내의 번잡함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고립된 산 정상의 외딴 곳에서 비구니들의 교육과 수행을 위한 사원을 설립했던 것은 수행의 목적과 더불어 자신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정도 해 볼 수 있겠다. 사원의 사방에 구축된 거대한 보루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한편으로 비구니의 출가 조건인 팔경계 중에 비구니는 비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야 하고 보름마다 비구에게서 교육을 받을 것, 비구 없이는 여름 안거를 지낼 수 없다는 점 등의 내용을 생각할 때 비구니사원에 비구가 거주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더구나 사원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 보루, 공양물로 추정되는 작은 불상들, 인장, 봉인물, 그리고 석회를 바른 바닥에 그려진 빨강, 초록, 노랑, 하양, 검정의 다섯 안료들로 볼 때 이 사원은 동부 인도의 건축물 중에서 이런 종류로서는 최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선원의 입구 위에는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비하르주 정부는 이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유적지 위로 큰 지붕구조물을 설치하고 관광객들이 유적을 훼손하지 않도록 별도의 통행로를 설치할 예정이다.

깨달음엔 성별 차이 없어 … 시대따라 여성 지위 변화

“잘 왔네, 비구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맞이하며 출가자가 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전 5세기경 고대 인도는 신분 간 불평등이 극심하고 여성 혐오나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흔했던 가부장제 사회였으므로 여성들의 출가는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파자파티를 포함한 석가족 여인들이 출가를 원했을 때도 부처님은 단호히 허락하지 않으셨다.

아난다의 거듭된 요청에도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수행해야 하는 일이 여성들에게는 적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아난다는 그녀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교단에 들어와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계속 말씀드렸고 부처님은 긴 생각 끝에 8개의 조건인 팔경계를 말씀하셨다. 이 여덟 개의 계는 마치 흐르는 물을 막아주는 둑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여인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며 출가의 뜻을 거듭 밝히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잘 왔네, 비구니여!”

당시 사회에서 이것은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보여준 것이었으며 깨달음을 얻는데 성별의 차이가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초기 경전에는 ‘여자도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은 물론 103명의 비구니와 43명의 우바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 사후 수 세기가 지나 승단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성별은 물론 출가자와 재가자 간 위계질서가 나타나면서 일부 국가에서 비구니승단이 사라지거나 현재까지도 복원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초기 불교의 원형이 많이 간직된 티베트 불교는 규율로서 성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나 여전히 독자적인 비구니 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경전에는 가부장적인 여성 차별적 내용과 부처님의 평등사상이 대립하고 있다. 여성이 미래세에 부처가 된다는 ‘여성수기설’ 처럼 남녀 평등사상과 더불어, 여성은 수행을 해도 부처도 보살도 될 수 없다는 ‘오장설(五障說)’ 등의 남녀 차별 사상, 이 중간적 입장에서 남성으로 변화하여 성불을 이룬다는 ‘변성성불론’ 등이 혼재한다.

이렇듯 불교에서 여성의 위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며 변화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깨달음을 추구하며 치열하게 정진하는 여성 수행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전통을 자양분으로 해서 현재 많은 여성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그 정신을 널리 펴고 있

다. 이러한 불자 여성들의 연대를 목적으로 전 세계에 평등과 자유를 전하려는 조직 중의 하나인 샤카디타(Sakyadhita: ‘부처님의 딸들’)가 1987년 27개 회원국에 1700여 명의 회원으로 인도에서 창립되어 2년마다 세계불교여성대회를 개최한다. 대회에는 전 세계의 비구니와 여성재가불자들이 모여 현 시대에서 여성불자로서의 역할을 점검하고 논의한다. 한국에서는 2004년 6월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제8차 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으며 향후 2023년 제18차 대회가 개최될 전망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고통과 무지에서 벗어나 깨달음과 평화를 얻음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 성별 구분은 없고 모든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구도의 길이 열려 있다. 몇 백 년의 시간을 두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 여성 출가자들의 수행터는 불교의

역사에 차마 기록되지 못한 그들의 존재와 구도 열정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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