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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끊긴 절터, 돌사자만 옛 영화 기억하네
길 따라 떠나는 사찰 순례 - 강릉 보현사·신복사지·한송사지
2021년 02월 08일 (월) 13:55:32 이창윤 budjn2009@gmail.com
   
▲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 834~930) 스님의 사리탑인 ‘낭원대사오진탑’(보물 제191호). 스님은 사굴산문 개산조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 820~889) 스님의 상수제자다.

불연(佛緣)의 땅 영동

산세가 험한 영동지방은 오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영동, 서울-양양 두 개의 고속도로와 미시령터널, 고속철도 등이 개설돼 쉽고 편리하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옛날에는 대관령이나 구룡령, 미시령, 한계령, 진부령 같은 험하디 험한 큰 고개를 넘어야 할 만큼 오지였습니다. 오죽하면 ‘대관령’이라는 이름이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왔다는 이야기가 전할까요?

교통의 오지였던 만큼 영동지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늘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소 예외였습니다.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의 진신을 찾아 오대산을 순례한 뒤 등명사(燈明寺), 법왕사(法王寺), 용연사(龍淵寺), 방현사(坊縣寺), 정암사(淨巖寺) 등 여러 사찰을 지었고, 의상과 원효 두 스님은 낙산을 찾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했습니다. 이처럼 영동지방은 신라 이래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불연(佛緣)의 땅’으로 여겨진 곳입니다.

통일신라 말에 이르러 영동지역에서는 새로운 불교의 기운이 일었습니다. 남종선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래한 도의(道義, ?~?) 스님이 양양에 은거해 전법할 때가 익기를 기다렸고,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 820~889) 스님은 강릉에서 사굴산문(闍崛山門)을 개창하고 선풍을 진작했습니다.

사굴산문의 본거지 강릉

영동지방의 중심지인 강릉은 사굴산문의 본거지입니다.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 스님이 나고 자라 출가한 곳도, 선문을 열어 일가를 이룬 곳도 강릉이었습니다. 범일 스님이 사굴산문을 개창한 이후 강릉지역엔 불교가 크게 일어납니다. 옥천동 사지, 수문리 당간지주, 대창리 당간지주, 보광리 석불좌상 등 강릉시 전역에 산재한 통일신라시대 유물·유적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범일 스님은 헌덕왕 2년(810) 명주도독을 지낸 아버지 김술원과 어머니 문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님은 스물한 살 때인 흥덕왕 6년(831)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제안 스님 회상에서 6년간 머물며 수행했습니다. 제안 스님은 ‘성불하는 법’을 묻는 범일 스님에게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고 답했다고 하지요. 제안 스님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범일 스님은 그 뒤 유엄 스님에게서 인가 받았습니다.

범일 스님은 당 무종의 회창법난(會昌法難)을 피해 상산(商山)에 은거했다가 6조 혜능 스님의 영탑에 참배하고 문성왕 9년(847) 귀국했습니다. 백달산에서 머물던 스님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로 자리를 옮겨 40여 년간 주석하며 후학을 길러냈습니다.

국사가 되어달라는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의 요청도 마다하며 정진한 스님은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 뒤 신라 진성왕 3년(889) 입적했습니다. 왕은 스님에게 ‘통효대사(通曉大師)’라는 시호와 ‘연휘(延徽)’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범일 스님의 제자로는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 834~930),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 832~916), 신의(信義) 등 십성제자(十聖弟子)가 있었다 합니다.

   
▲ 낭원대사 개청 스님이 주석하던 강릉 보현사. 보현보살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범일 스님의 상수제자 개청

범일 스님의 상수제자인 개청 스님은 경주 출신으로 원래 화엄학승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살 때 화엄사 정행(正行) 스님에게 출가한 스님은 범일 스님의 명성을 듣고 굴산사로 찾아가 제자가 됐습니다. 스님은 스승이 입적한 후 행적 스님과 함께 사굴산문을 이끌다가 알찬 민규의 청으로 강릉 보현사로 옮겨 지장선원을 열고 이 절을 사굴산문을 대표하는 사찰로 가꾸었습니다.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 스님을 국사로 모셨습니다. 스님이 입적하자 고려 태조는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悟眞)’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스님의 제자로는 신경(神鏡), 총정(聰靜), 월정(越晶), 환언(奐言), 혜여(惠如), 명연(明然), 홍림(弘琳) 등이 있었습니다.

개청 스님이 법석을 펼쳤던 보현사로 가려면 강릉시내에서 대관령 옛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굴면동삼거리에서 성연로를 따라 접어들어 보광리에 이르면 왼쪽으로 보현사 입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에서 4km 가량 호젓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다소곳이 앉은 보현사가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보현사는 보현보살이 창건한 절이라고 합니다. 옛날 강릉 남항진 해변에 문수, 보현 두 보살이 도착해 문수사(한송사)를 지었는데, 보현보살이 “한 절에 두 보살이 있을 수는 없다.”며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지은 절이 보현사라는 것입니다.

일설에는 자장 율사가 보현사를 창건했다고도 하지만, 실제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개청 스님이 민규의 청으로 이곳에 주석했으므로, 적어도 범일 스님이 입적한 진성왕 3년(889) 무렵에는 이미 경영되고 있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경내에는 개청 스님의 사리탑인 보물 제191호 ‘낭원대사오진탑’과 스님의 탑비인 보물 제192호 ‘낭원대사오진탑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인 대웅전 등이 있습니다.

산지가람이어서 경내는 크지 않고 아담합니다. 마당에 서서 멀리 강릉 앞바다를 바라보면, 새로 뚫린 영동고속도로 교각 위로 차량만 부산하게 오갈 뿐, 지나가는 바람마저 조심조심 돌아나가는 한적한 도량입니다.

개청 스님의 사리탑은 천왕문을 끼고 돌아 담장을 따라 300m쯤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개청 스님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스님을 보현사에서 300보 쯤 떨어진 서봉(西峰) 석실에 임시로 모셨다가 사리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팔각원당형인 사리탑은 중대석과 상륜부 일부가 없는데, 일찍이 도괴됐기 때문이라 합니다. 사중에서 사리탑을 다시 세워 절 입구에 두었다가 지금 위치로 옮겼다고 하지요.

   
▲ 강릉 신복사. 통효대사 범일 스님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옛 강릉의 읍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전한다.

강릉지역 불상 전형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보현사에서 나와 신복사지(神福寺址)로 향했습니다. 신복사지는 강릉시청에서 멀지 않은 내곡동 탑골에 있습니다. 보현사에서 차로 13km쯤 달려야 합니다.

신복사 관련 기록은 관찬 사서나 불교문헌에는 보이지 않고, 정조 10년(1786)에 편찬된 옛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만 “심복사(尋福寺)가 있으나 폐사됐”고, “범일이 신복사와 굴산사를 창건했다.”고 전할 뿐 입니다. 그마저도 실제 범일 스님이 창건했는지는 불분명하고, 어떻게 법등이 이어졌는지, 언제 폐사됐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신복사는 ‘심복사(尋福寺)’나 ‘신복사(神伏寺)’로도 불렸는데, 1936년과 1937년에 ‘신복(神福)’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절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절터에는 보물 제87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88호 석조보살좌상이 남아있을 뿐 옛 사찰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신복사지는 2002년과 2003년 잇따라 영동지방을 할퀴고 간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뒤,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조사에서 건물지 3곳, 석축 1곳, 구들시설 1기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고려시대 기와류였다고 합니다. 이런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학계에서는 《증수임영지》 기록과는 달리 신복사가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 무렵 창건돼 조선 중기 무렵 폐사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복사지 삼층석탑은 각층 탑신 밑에 별도의 괴임돌을 놓은 것이 특이합니다. 석조보살상은 탑을 향해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공양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 모습은 국보 제48-2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유사합니다. 신복사지와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머리에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쓴 것도 특징인데, 강릉 한송사지에서 출토된 국보 제124호 석조보살좌상도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어서 세 석조보살좌상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사굴산문이 융성했던 강릉지역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평가하지요.

   
▲ 일제 강점기 당시인 1912년 와다 유지가 일본으로 반출했던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한일협정으로 반환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일본으로 반출됐다 돌아온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문수사로도 불리는 한송사지는 신복사지에서 찻길로 8km쯤 떨어진 강릉산림항공관리소 부근에 있습니다. 2010년까지만 해도 절이 경영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고, 사지도 군부대 안이어서 지금은 들어가 볼 수 없습니다.

문수사로도 불린 한송사도 신복사와 마찬가지로 자세한 절의 내력을 알 수 없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220여 칸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한송사지에서 멀지 않은 남항진 해변의 한 상인은 “통일신라시대 때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일 정도로 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절의 규모가 과장된 것이겠지만, 그만큼 지역에서는 큰 사찰이었겠구나 싶습니다. 그 상인의 말에 따르면 한송사는 큰 해일 피해를 입어 폐사됐다고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조선 정조 23년(1799) 편찬된 《범우고》에 ‘한송사’라는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법등을 이어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가정집(稼亭集)》에는 <동유기(東遊記)>라는 여행기가 수록돼 있습니다. 여기에 한송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다. “문수당을 구경하니, 사람들의 말이 문수·보현 두 석상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는 기록입니다.

이곡이 사람들의 말을 빌려 전한 문수·보현 두 보살상은 각각 국보 제124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보물 제81호 한송사지 석불상입니다. 두 불상은 일제 강점기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라는 강릉측후소 기사가 수집했는데, 와다는 그중 문수보살상을 1912년 일본으로 반출했다가 동경제실박물관(오늘날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 문수보살상은 한일협정으로 반세기만인 1965년 우리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도 문수보살상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지금은 국립춘천박물관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파손된 부분이 많아 명주군청에 남겨졌던 보현보살상이 강릉시청을 거쳐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문수보살은 언제 강릉으로 돌아가 보현보살과 재회의 기쁨을 누릴까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반면 보현보살은 실천을 상징합니다. 미술사학가들은 두 석조보살상이 손에 지물을 들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남항진 해변 상인의 말에 따르면 폐사 전 한송사에는 금으로 조성한 큰 불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문수·보현 두 보살상은 금불상의 협시보살이었을까요? 먼발치에서라도 절터를 보려고 근처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온 후 보현보살상을 뵈러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갔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야외 관람만 가능해 그곳에서도 발길을 돌려야 해 아쉬웠습니다.

강릉에는 경포팔경(鏡浦八景)이 있습니다. ‘경포호수 주변의 경치가 뛰어난 여덟 곳’을 일컫는 말인데, 그중 하나가 ‘한송모종(寒松暮鐘)’, 즉 ‘한송사의 저녁 종소리’입니다. 시인묵객과 불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저녁 종소리는 끊어진지 오래지만, 한송사 옛터에는 문수, 보현 두 보살을 떠받친 부서진 사자와 코끼리 모양의 석조대좌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돌사자와 돌코끼리는 예전처럼 문수·보현 두 보살을 모실 그날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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