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률사, 사진 제공 경주시.

백률사 어디에 있는 절인가

경주는 한국의 불국토이다. 신라인은 수많은 절과 불상을 조성하여 경주를 이상세계로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많은 불교문화가 사라졌으나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충분하다.

어느 왕조보다 불교가 융성했던 까닭에 신라불교는 별 어려움 없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수용은 수월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의 영토는 지금의 영남(嶺南)지방이다. 고개 남쪽지역인 탓에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유입도 늦었다. 그곳의 토착신앙은 불교수용을 반대하였다. 그런 갈등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불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것을 순교라 한다. 불교는 교리적 내 용은 물론 여러 지역으로 전파된 역사에서도 포교를 위해 무력을 사용한 일 이 없다. 받아들이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지 불교신앙을 강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보다 불교를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이상세계를 구축한 신라에 순교자가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그래서 연재의 첫 번째 순서로 순교자와 인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경주시 동쪽 동천동에 가면 작은 산이 있다. 예전에는 금강산이라 불렀는데 요즘은 소금강산이라 칭한다. 산세가 강원도 금강산처럼 빼어나서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가면 작은 사찰이지만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백률사가 있다. 신라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이 순교할 때 그의 머리가 이곳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왕이 국문하고 참수한 곳은 월성이었을 텐데 이곳까지 날아왔다고 하니 순교의 신이로움을 표현하려는 신라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을 인연으로 6세기 초반 무렵 사찰이 세워졌으니 무려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순교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신라의 불교수용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신라 13대 미추왕2년(263) 고구려에서 온 아도 스님이다. 그가 신라에 왔을 때 사람들은 불교를 몰라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일선현 모례의 집에 숨어 있다가 공주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천경림에 절을 짓고 교화를 시작하였다. 미추왕이 죽자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 비교할 때 신라불교가 빠르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후대의 과장으로 보인다.

신라는 17대 내물왕 이후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국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통치력과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세계가 필요하였다. 부족국가 때는 하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과 무속신앙 정도면 충분하였다. 그러나 고대국가 체제가 되고 새롭게 들어선 지도자는 앞에서 사용하던 사상과 신앙을 그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차별성이 없으면 대중의 지지와 복종을 이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에게 불교의 업설과 전륜성왕 사상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업설은 선악의 행동에 의해 과보를 받는다는 교리이다. 이런 내용으로 새롭게 등장한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생부터 선한 일을 많이 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전륜성왕은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불교의 이상적인 왕이다. 전륜성왕이 되기 위해서는 전생에 선한 행동을 많이 해서 번뇌가 모두 사라진 보살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지도자가 훌륭한 왕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었다. 신라보다 앞서 고구려와 백제 역시 고대국가 체제가 되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권력에 밀려난 지난 지도자와 지지자들은 무속보다 뛰어난 내세관을 갖춘 불교가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이 상실되는 불교 수용을 강력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신라의 불교 수용은 고구려와 백제보다 늦었고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9대 눌지왕(417~458) 때로 본다. 다음 20대 왕이 자비왕(慈悲王)인 것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후 21대 소지왕 때 역시 여러 스님들이 신라에 와서 포교하면서 신봉자가 생겼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무속과 토착신앙을 신봉하던 사람들은 불교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마침내 21대 소지왕 때 궁중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스님을 유혹하여 제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불교가 위축되면서 22대 지증왕 때는 불교 관련 기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가 위축되면서 왕권도 흔들렸다. 신라는 김 씨에 앞서 박 씨와 석 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17대 내물왕부터 김 씨 세습제가 되면서 박 씨와 석 씨의 불만이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23대 법흥왕은 다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수용이 절실하였다. 고민이 계속되자 이를 눈치 챈 이차돈이 불교 수용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차돈은 왜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을까? 이차돈은 법흥왕의 5촌 조카이다. 이차돈의 아버지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아진종으로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갈문왕은 자신은 왕이 아니지만 자식이 왕일 경우 붙여주는 칭호이다. 법흥왕의 아버지가 지증왕이고 지증왕의 아버지가 습보갈문왕이다. 그렇다면 법흥왕과 이차돈의 아버지는 사촌이다. 이차돈의 아버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나 별다른 행적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차돈은 왕실의 도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자신을 희생해서 김 씨 왕조의 굳건한 토대를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 이차돈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창윤

이차돈의 순교 과정

이차돈의 이름은 염촉(厭髑)이다. 성은 《삼국유사》에 박 씨라 전해지고 있으나 증조부와 법흥왕과의 항렬을 보면 김 씨가 맞다. 그의 순교 과정을 보면 절실함이 묻어난다.

이차돈이 나이 스물두 살로 사인(舍人; 신라 때, 십칠 관등(十七官等) 가운데 열두째 등급(等級) 대사(大舍)와 열셋째 등급(等級) 사지(舍知)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의 자리에 있을 때 불교 수용을 걱정하고 있는 법흥왕의 얼굴을 보고 “신이 들으니 옛사람은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하니 중죄를 피하지 않고 대왕의 뜻을 여쭙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네가 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뒤에는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사령을 그릇되게 전했다고 하여 신을 형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차돈의 말에 왕이 답했다.

“살을 베어 저울에 달더라도 한 마리 새를 살리려고 했고,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서라도 일곱 마리의 짐승을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네가 비록 공덕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버리기 어렵지만 제 목숨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가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다시 중천에 오르고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따오기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건널 기세를 품었다고 하더니 네가 이와 같구나. 가히 장부의 행이라고 할 만하다.”

이차돈은 왕명이라 둘러대고 절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신하들이 왕에게 알렸다. 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으며, 절을 지으려 하는 것처럼 조작하여 항의하는 것은 어려움에 빠뜨리려는 계책이라고 꾸짖었다. 사실을 확인한 왕은 이차돈에게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실행한 죄를 물어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죽음을 앞둔 이차돈이 발원하였다.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므로 저는 신명을 돌보지 않고 인연을 모두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사람들에게 두루 보여주소서.”

그의 발원이 통했는지 참수 후의 상황 역시 신이로움으로 가득하다. 《삼국유사》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옥리가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머리가 날아가서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하늘은 사방이 침침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꽃비가 내렸다. 왕의 슬퍼하여 흘린 눈물이 옷을 적셨다. 재상은 근심하여 땀이 모자 밖으로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면서 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었고,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지니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듯 이별을 애석해 하였다. 상여를 바라보며 장송곡을 듣는 이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하였다.

모두가 이렇게 말했다.

“개자추가 다리 살을 벤 것도 이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인들 어찌 이 장렬함에 견주랴. 이는 임금의 신앙력을 붙들어 아도(阿道)의 불심을 이룬 성자이다.”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다. 좋은 터를 잡아서 절을 짓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다. 이곳에 예를 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고, 사람마다 도를 닦으면 불법을 깨달았다.

자추사에서 백률사로

▲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사진 제공 경주시.

머리가 떨어진 곳에 처음 세운 사찰은 자추사였다. 지금은 백률사로 불린다. 언제 바뀌었을까? 《삼국유사》를 보면 백률사와 관련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32대 효소왕(687~702)은 부례랑을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으로 임명하였다. 효소왕 2년(693년) 3월 부례랑이 외지에서 훈련하다가 북방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이때 신라의 변란을 막아주던 거문고와 피리가 사라졌다. 왕은 이를 찾고자 현상금을 내걸었고, 부례랑의 부모는 5월 백률사 대비(관음)상 앞에서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도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자 부례랑이 불상 뒤에 도착해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스님이 나타나 피리를 두 쪽으로 나누어 부례랑과 동료를 태우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 신라로 왔다는 것이다. 왕은 크게 놀라며 사람을 보내어 부례랑을 맞아들이고, 거문고와 피리도 대궐 안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50량의 금과 은으로 만든 다섯 개의 그릇 두 벌, 마납가사 다섯 필, 명주 3000필, 밭 1만 경(頃)을 절에 시주하여 대비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사람들에게 관작 3급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적어도 693년 이전에 이미 백률사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률사가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찰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이차돈기념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914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기념비는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으로 부르기도 한다. 몸을 바쳐 부처님께 공양한 것을 의미한다. 6면체 기둥으로 높이는 1m 조금 넘고 각 면의 넓이는 29cm이다. 1면에 목이 참수되면서 피가 한 길이나 치솟은 장면이 새겨져 있다. 다른 5개의 면에는 그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파악이 어렵다.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연호나 연도가 없어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염촉에 관한 내용이 서술된 때를 고려하여 헌덕왕 9년(817) 무렵으로 추정한다.

김경집•진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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