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가 제10회 한국불교선리연구원 학술상 서봉상 수상작 ‘일제 강점기 평양불교청년회의 설립과 활동’을 주제발표하고 있다.

제10회 한국불교선리연구원 학술상 서봉상(우수상) 수상자와 수상작은 김경집 진각대학원 교수의 ‘일제 강점기 평양불교청년회의 설립과 활동’이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사료 발굴과 분석을 통해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공백으로 남은 일제 강점기 북한불교, 그중에서도 평양불교계의 역사 복원을 시도했다.

근·현대불교사 공백 일제하 평양불교 복원

김 교수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한국불교는 사찰령 제정과 일본불교의 왕성한 활동 등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각 본산별로 포교당을 세우고 불교교육을 실시하는 등 근대적 활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교세가 약했던 평양불교계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30본산 예산 책정 시 평양지역 본산인 영명사는 9등지로 분류돼 분담금은 1등지인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의 1/36 수준이었다. 더구나 평양은 신자 수가 불자의 다섯 배에 이를 정도로 개신교 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현실을 타계하고자 강원지역 본산인 유점사가 평양에 포교당을 건립했다. 유점사 평양포교당 건립은 1913년 시작돼 이듬해 마무리 됐다. 평양포교당이 설립되자 일요일마다 수십, 수백 명의 신도가 모여 불공을 올리고 설법을 듣는 등 평양불교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평양불교청년회가 설립된 것은 주지의 범계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으로 폐지되었던 평양포교당이 다시 문을 연 2017년 12월 즈음의 일이다.

평양포교당 중흥·활성화 목적 창립

용성 스님을 스승으로 보살계를 받은 후 유점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윤주일(尹柱逸)은 1918년 평양포교당의 중흥과 활성화를 목적으로 평양불교청년회를 설립하고 간사장에 피선됐다.

평양불교청년회는 화복을 비는 신앙에서 민중행복과 사회 안녕을 인도하는 사회적 불교로 평양 불자들의 신행 향상을 바꿔나갔다. 학교와 병원, 유치원 등 사회사업으로 공덕과 자산의 보급을 추진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평양불교청년회의 노력으로 평양불교계의 교세는 불교 행사가 있으면 남녀 신도 10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확장됐다.

평양불교청년회는 1920년 6월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설립되자 평양지회로 가입했다. 조선불교청년회 발기위원으로 참여한 윤주일의 노력이 컸다.

조선불교청년회 설립 후 지회로 가입

평양지회는 청년자제를 위한 야학강습소 개최, 고학생 후원회 발기회 조직, 위생 및 교육에 관한 환등회(幻燈會) 개최, 불경강습소 개최 등 다양한 자체 활동을 펼쳤다. 또 윤주일이 1921년 설립된 평양고아원 관리자이자 사립 명성학교에 교장으로 활동하는 등 평양포교당에서 이루어진 불교활동에도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평양지회는 조선불교청년회가 인심(人心)의 조류에 상응하는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각 지방을 순회 포교하는 순강단(巡講團)을 결성하고 활동에 나서자 이를 지원하는 등 계몽활동도 왕성하게 전개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평양지회는 평양의 대중뿐 아니라 당시 불교인에게 20세기 사회에 맞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한 청년회로 평가받았다.

평양 불교청년의 구심점

평양지회는 1923년 3월 3일 다시 평양불교청년회로 돌아갔다. 김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조선불교청년회 지회를 넘어 평양의 모든 불교청년들의 구심점이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평양불교청년회가 활동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평양의 모든 청년 불자와 포교당 대중을 포용하기 위한 신행 증진 불사였다. 이들은 1929년 6월 7일부터 9일까지 금강계단을 마련했는데, 수계자가 300백 명에 이를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금강계단은 “이교도의 세력이 커서 불교를 여지없이 억압하려는 곳에서 엄정한 계율을 설해 사마(邪魔)를 항복하게 하는 가치 있는 일”, “평남 불교계에 일대 서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평양불교청년회는 또 경성불교전도대 초청 가상전도(街上傳道)와 강연, 중앙 불교인사 초청 불교 강화, 전평양불교신도대회 개최, 음악·무용·소인극 등 불교기념일 대중공연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신행 증진 불사, 신행조직 결성 밑거름

평양불교청년회가 펼친 신행증진 불사는 남자 선회(禪會)인 녹야원회와 부인 선회인 룸비니회 등 선회와 평양불교소년회, 평양불교부인회, 남녀 혼합 신행단체인 도피안회 등 1930년대 이후 평양포교당 신행조직 결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평양불교청년회의 왕성한 포교활동은 사회활동 참여의 원동력이 되었다. 평양불교청년회 회원들은 개인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윤주일은 노동운동에 가담했고, 백선행, 김인정 등은 공공기관 설립에 참여했다. 백선행은 광성소학교·숭현여학교를 기증하고, 다리(客山橋)와 공회당을 건립했다. 김인정은 평양도서관을 건립했고, 윤주일·김명성·안창보 등은 체육시설인 장무회관(獎武會館)을 건립·운영했다. 윤주일은 1936년 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생원을 건립했다. 김 교수는 “평양불교청년회 회원의 개인적 참여는 사회활동의 지평을 넓혔다.”고 밝혔다.

사회참여활동 불교에 대한 인식 높여

학생 감금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일경을 규탄하거나, 평양사회에 늘어나는 무속과 기생을 없애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평양불교청년회는 다른 청년단체, 타종교 청년회와 연계해 사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개인 회원 차원이든 평양불교청년회 차원이든 이같은 평양불교청년회의 사회참여활동은 불교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불교신도 증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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