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석굴암 본존불(왼쪽) 대신 반출돼 공진회에 전시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가운데)와 반출되기 전 석조약사여래좌상(오른쪽).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한국 미술사학의 태두 우현 고유섭 선생은 그의 제자 윤경렬에게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고자 한다면 경주 남산에 가보라.”고 했다 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에 발간한 《경주 남산》에 따르면 경주 남산에는 63개 계곡에 107구의 불·보살상, 96기의 석탑, 147개소의 사지가 산재해 있다. ‘노천박물관’이라는 평가가 허사로 들리지 않는다.

불·보살상과 유물, 유적을 찾아 경주 남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이곳이 현실세계에 불국토를 이루려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자, 우리나라 불교문화유산의 보고임을 깨닫게 된다.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에 대한 그동안의 조사·연구 성과를 되짚어 보고, 역사성과 종교성을 종합적으로 살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와 한국미술사학회(회장 방병선)는 경주 남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20주년을 기념해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12월 12일 오전 10시 30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생중계된 학술대회 영상(https://youtu.be/fgDhV182cRQ)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아라키 준 “석굴암 본존 대신 삼릉계 약사여래 반출”

이날 학술대회에서 아라키 준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은 주제발표 ‘일제 강점기 경주 남산 초기 불적조사’에서 경주 남산 석불 중에서 원상태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불상으로 평가 받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 어떻게 경성(서울)으로 반출됐는지를 구명했다.

아라키 연구원에 따르면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 반출된 것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식민이데올로기인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조선정체성론(朝鮮停滯性論)’으로 무장돼 있던 데라우치는 신라왕조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를 이룩했으나 그 뒤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립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조선왕조는 국력이 쇠퇴하여 멸망했다고 생각했다. 데라우치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해체하고 그 한복판에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석굴암을 옮겨 세움으로써 일본제국이 조선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 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데라우치의 석굴암 이전 계획은 경주군 서기 기무라 시즈오의 반대와 해체 운반의 기술·재정적 어려움으로 무산됐다. 데라우치는 그즈음 개최된 공진회 미술관 중앙홀을 석굴암처럼 꾸미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는데, 그때 석굴암 본존불 대신 봉안된 것이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라는 것이다.

아라키 연구원은 “삼릉계 약사여래좌상 반출은 석굴암 경성 이전 계획과 1915년 공진회의 성공적 개최라는 데라우치 총독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김동하 “경주 남산은 ‘수행자의 공간’”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주제발표 ‘경주 남산 불적(佛蹟)의 분포와 성격’에서 경주 남산이 산지계곡이라는 특성상 많은 이가 오랫동안 머물며 기도하거나 수행할 여건이 아니었는데도 신라인은 왜 곳곳에 절을 짓고 불상과 탑을 조성했는지 살폈다.

김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신라시대에 수많은 절과 불상, 탑을 경주 남산에 조성했던 것은 이곳이 ‘수행자의 공간’으로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왕경 중심부에서 멀지 않고, 돌산인 탓에 수행의 일환으로 공덕을 쌓기 위해 불상과 탑을 조성하기 수월했다는 것이다.

김 학예연구사는 경주 남산의 사찰이 왕경의 평지사찰과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삼화령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한 충담 스님의 일화처럼 평소에는 왕경에 있는 본사에 머물면서 특정 시기나 기간에 남산으로 가 수행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김 학예연구사는 “경주 남산에 분포한 수많은 탑상은 수행자 한 명 한 명이 쌓은 공덕의 과정이자 결과”라며, “경주 남산의 불적을 이해하는 핵심어는 ‘승려’, ‘수행’, ‘공덕’”이라고 말했다.

하정민 서울대 교수는 주제 발표 ‘경주 남산의 통일신라시대 불교 석경’에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경주 남산 칠불암과 창림사지 석경에 주목했다. 하 교수에 따르면 칠불암에서는 8세기 전·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경》과 《금강경》 석경이 발견됐다. 하 교수는 이 석경이 칠불암 사역 내 마애삼존불과 사면석불을 아우르는 목조 가구(架構) 내부 벽면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창림사지 석경은 9세기 중엽, 탑을 새로 조성하는 등 불사를 행할 때 함께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 교수는 “공덕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법화경》 석경이 조성되었을 것”이라며, “창림사지 석경은 통일신라기 《법화경》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정호 “‘수구다라니’, 범한본으로는 ‘유일본’”

한정호 동국대 교수는 ‘경주 남산의 사리장엄구’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이하 수구다라니>를 소개했다. 이 다라니는 2매인데, 범자와 한자로 각각 필사돼 있다.

범자본 《수구다라니》에는 중앙에 금강저를 든 금강역사가 왼손 손가락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인물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자본 《수구다라니》에도 사방 모서리에 정병이 있는 연화좌와 다양한 법구, 연꽃 수염(蓮花鬚)이 그려져 있다.

한정호 교수는 《수구다라니》가 “불교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범자본과 한자본이 합치된 유일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특히 범자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된 실담문자가 아니라 나가리문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국내 고대 문자자료 중 나가리문자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암고서박물관 ‘무구정광대라니’는 창림사지 석탑 출토품”

한 교수는 또 1824년 한 석공이 창림사지에 있던 석탑 3기 중 한 기를 헐었을 때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성암고서박물관이 소장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성암본)이라고 논증해 눈길을 끌었다.

한 교수는 성암본과 추사 김정희가 석탑에서 발견된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 (이하 무구정탑원기) 모사본을 이어 표구한 접철본(이하 추사본)을 비교해 추사본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실은 “추사가 성암본을 복사한 듯 정밀하게 베껴 쓴 모본(摹本)”임을 밝혔다.

성암본 변상도도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임을 논증하는 근거가 됐다. 성암본 변상도는 황색비단에 금니로 그린 것인데, 추사본에 추사가 직접 사리장엄구 출현 경위와 발견 유물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한 것과 일치한다. 추사는 “두루마리 앞면의 황색비단에는 금니로 그린 변상도가 있다.”고 적었다. 또 주존과 묘사된 탑이 전형적인 신라 3층 석탑인 점, 석탑 기단부에 그려진 칼을 든 것으로 추정되는 신장상이 9세기 중엽 이후 신라 석탑의 특징인 점도 근거로 제시됐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이밖에도 △제3공화국과 경주 남산(강희정·서강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 남산(이명옥·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삼릉계 제2사지 석조불좌상의 복제와 착의법(송은석·동국대) 등 주제발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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