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은 참선으로 일대사 인연 마쳐야”

 

큰 스님들의 법문이나 가르침은 한결같다. 계율 잘 지키며, 끊임없이 수행할 것이며 자비심을 잃지 말라는 말씀뿐이다. 때로는 단조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볼일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가르침들이 재미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렇지만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본분사(本分事)다. 본분사는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아니다. 본분사는 하드웨어다. 결코 변할 수 없다. 때로는 중생들에게 간절하게 다가와 식상함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하다.
한국불교가 지금까지 면면히 계승되어 왔고 앞으로 이어져 내려간다면 이것은 반드시 큰 스님들의 본분사에 대한 준엄한 경책 때문일 것이다. 특히 종수(宗壽, 1918~1985)스님의 본분사는 한국현대불교사에서 사부대중들에게 훌륭한 귀감으로 다가온다.
종수스님은 1918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났다. 서씨(徐氏)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스님이 어머니 태중(胎中)에 있었을 때 노스님이 발우를 갖고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인연이다. 출가는 팔공산 파계사(杷溪寺)에서 벽담(碧潭)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했고, 동화사(桐華寺) 강원에서 경학(經學)을 연마하였다. 스님은 또한 동화사 금당(金堂)에서 100일간 일식불와(一食不臥)하며 수행자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특히 금강산 마하연에서는 만공(滿空)스님에게, 오대산에서는 한암(漢岩)스님 문하에서 수행의 기초를 탁마할 수 있는 복락의 기회도 있었다.
스님은 1963년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에 추대되었다. 전계대화상은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운영하며 수계식 등을 관장하는 소임이다. 평소 스님이 행하신 청정계율정신의 결과인 것이다. 스님이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된 것은 나이 46세 때다.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종정이셨던 효봉(曉峰)스님이 바로 추인할 정도였다. 스승 자운(慈雲)스님 역시 율(律)에 있어서는 종수스님을 따라갈 수행자는 없을 것이다. 스님을 본받아 정진하라고 당부하셨다.
도대체 스님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교계에서 특혜 아닌 특혜를 받을 수 있었을까. 스님은 상좌들에게 “중이 되어 수행하는데 있어 여자와 돈을 조심해야 한다. 둘을 멀리하는 것이 수행의 첫걸음이다”고 당부하셨다. 듣고 있던 상좌가 “그래도 번뇌가 쌓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자 “그럴 때 마다 너의 깎은 머리를 만져 보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세상 등지고 부모 버린 채 집을 나설 때(出家)를 한시도 잊지 말라는 스승의 짧지만 간곡한 당부다. 도반들이 스님을 골탕 먹이려고 여인을 시켜 말을 건네도 묵묵부답이었으니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이었으니 계율, 수행, 깨달음 외에는 스님의 오감(五感)을 만족시킬 만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삶 그자체가 후학들에게 수행의 지침이 된 것이다.
율사 종수스님은 비구계를 설하는 자리보다는 보살계(菩薩戒)를 펴는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이유는 “보살계 자체가 불교에 대한 신심을 깊게 하는 힘이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기반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보살계는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따지고 나누기는 다반사로 행해지는 일이다. 특히 종교 간의 대립은 그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스님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식과 정도를 지킨다면  강제적인 법률은 필요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살계는 갈등과 분열, 번뇌의 원인을 막아내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속인의 적은 그릇의 깊이로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이 스님이 율사(律師)이면서도 분별심을 놓아버린 것은 당신이 선사(禪師)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율사가 아니고 선사다. 계율은 마땅히 스님이니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선사일 뿐이다. 중은 참선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대사 인연을 마쳐야 한다.”
계는 스님에게 정각(正覺)을 위한 수단이지 궁극의 목적은 아니었다. ‘전계대화상’의 칭호는 수행자로서는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강을 건넌 뒤에 버려야 할 뗏목에 불과한 것이다. 때문에 스님은 무(無)자 화두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수행에 우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스님은 스스로 주지소임을 맡지 않고자 했으며, 제자들 역시 주자소임을 맡는다면 야단맞기 일쑤였다. 제자들은 아침 일찍 팔공산 파계사를 나와 저녁 늦게 언양 석남사로 도착할 때 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과묵하셨던 분으로 회고한다. 한 세상 부처님 법 만나서 그 안에서 살다가 본래 온 그 자리로 돌아갔으니 스님은 참 행복할 것 같다. 승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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