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자의(字意)는 ‘반연해 일어남’이다.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가능함을 일컫는 말이다. 곧 상의상존적(相依相存的) 이치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한 지혜[般若]가 깨달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내용의 깨달음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까지도 아우르는 불교의 사회참여적 성격을 받쳐주는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무량수경》에서는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 국토의 사람들이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절대로 깨달음을 얻지 않으리라” 하고, 《화엄경》〈보현행원품〉에서는 “보리는 중생에 속한 것이니 중생이 없으면 일체 보살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지 못하니라”, “모든 이를 부처님 대하듯 하라. 중생을 위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공양이니라” 한다. 한결같이 ‘나’가 아닌 ‘남’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이 보인다. 불교적 깨달음은 대내적 활동의 잣대가 아닌 대사회 활동이 비춰진 거울 속에서 그 시비(是非)를 가려낼 수 있고, 부처님 45년 전법교화도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교해(敎海)에 정(靜)적인 성언(聖言)만이 가득 차 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요, 아집이요, 독선이다. 동(動)적인 성언도 그 만큼 짝 이루고 있음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한국불교가 이타(利他)와 현실참여(現實參與)를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맞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끼의 뿔, 동그란 삼각형으로 만드는 우(愚)는 더 이상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 “너와 나는 한 몸이다. 너의 고뇌는 나의 고뇌이고 네가 안락하면 나도 안락하다”는 동체 대비사상에 입각해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나누는 전법포교의 다름 아니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법진 스님/불교저널 발행인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