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집 앞쪽에 텃밭이 있다. 100평쯤 될까? 그 절반에는 매실, 사과, 복숭아 등의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어 채소나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밭은 50평 남짓하다.

텃밭이 있어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은 깨끗하고 싱싱한 채소와 이런 저런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텃밭이 주는 가장 큰 이로움은 수행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스승, 백봉 김기추거사는 좌선과 더불어 동선(動禪)도 강조했다. 《유마경》에는 좌선하고 있는 사리불이 유마거사에게 야단맞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스승은 언제나 좌선하고 있는 마조(馬祖) 앞에서 남악(南嶽)이 기와를 갈았던 이야기를 들며 좌선만을 고집하는 한국의 선 수행 관행을 아쉬워했다.

“앉는 게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니에요. 앉아 있는 것이 방편 중에 제일 좋은 방편이에요. 사량 분별을 여의는 겁니다, 조용하게 딱 앉아서. 그러나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소를 때려야 되겠느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느냐? 소를 때려야 되거든요. 본래의 해말쑥한 자리, 본래의 그 성품 자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성품 자리, 이거 하고 싸워야 돼요. 싸우는 그 놈이 바로 성품이지만. 이걸 모르고 하루 종일 앉아보세요. 어디 앉은뱅이 부처가 있던가요? 일을 시켜야 해요. 흙을 만지고 물을 만지고 하는 것 참 몸에 좋습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 세 시간이나 다섯 시간쯤 일을 시켜요. 일하면서 화두를 갖도록 해야 되는데, 우리는 새말귀가 있지만, 절에서는 일을 하며 ‘어떤 놈이 일을 하는지?’, 예를 들면 ‘너 목수일 참 잘하네. 그 일 누가 하나? 그 손에 자체성이 있는가?’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할 때도 ‘누가 일을 하는가’ 묻는 새말귀 수행

스승인 백봉 김기추 법사가 유성에 보림선원을 열었을 때 그 곳에는 ‘낮에는 앉지 않는다.’는 규범이 있었다. 스승이 부산에 머물 때는 일을 할 공간이 없으니 그 규범을 적용하지 못했지만 말년에 지리산 산록에서 학인들과 지낼 때는 다시 그 규범을 적용했다.

열 명 가까운 학인 들은 선원 뜰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바위와 돌을 캐내어 밭을 만들고 그 곳에 나무나 곡식을 심고 가꾸었다. 나무를 심어 과일을 얻고 곡식을 심어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도 의미 있었지만 그 보다는 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선원에 오기 전 좌선에 습(習)이 든 학인은 낮에 앉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스승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 학인이 일터에 없는 것을 알면 바로 데려오게 했고 야단을 쳤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육체노동은 내 수행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일을 할 때는 ‘새말귀’를 잡는다.

‘누가 일을 하는가? 몸은 무정물이다. 자체성이 없다. 일을 해도 일을 하는 줄 모른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주인공 자리가 이 몸을 써서 일을 한다.’

20평 농사도 만만치 않아

다행히 전원주택에는 사시사철 꽤 많은 일감이 있다. 텃밭 가꾸기는 단연 가장 큰 일감이다.

이사 와서 처음에는 50평쯤 되는 밭을 모두 일구었다. 고향에서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를 모셔와 농사일을 배웠다. 상추, 고추, 토마토 등 채소는 한두 두둑이면 족했다. 검은콩, 메주콩, 고구마, 감자 등이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메주콩을 두 말 가까이 수확하여 두 해 연속 된장을 담았다. 그러나 된장은 잘 숙성되지 않았다. 마당의 강한 볕과 열기에 수분이 증발하여 건조해지고 그런 상황에서도 구더기는 기승을 부렸다. 어머니의 오랜 경험도 효험이 없었다. 결국 된장을 포기하고 메주 콩 재배를 중단했다.

고구마와 감자는 한 해 재배하고 포기했다. 진흙 성분이 많아 물빠짐이 좋지 않은 밭이라서 수확도 신통하지 않았고 특히 캐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결국 두 해 농사를 하고 나서는 밭의 절반만 써왔다.

​불과 스무 평 남짓한 땅이지만 농사일은 만만하지 않다.

일 년에 세 번, 즉 농사가 시작되는 4월, 서리태를 심는 6월, 그리고 김장 배추와 무를 심는 8월에는 유기질 퇴비를 뿌린 후 땅을 갈고 두둑을 만들어야 한다. 쟁기를 끄는 황소도, 트랙터도 없다. 그러니 내 힘으로 해야 한다. 두세 시간쯤 걸리는 일이지만 이삼 일은 근육통을 앓았다.

농사지으며 깨닫는 각자의 ‘자성’

그러나 텃밭 농사는 재미있다. 여름에는 열무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청양고추 두 포기, 보통고추 다섯 포기를 심어서 풋고추를 실컷 따먹고 고추가 붉어지면 마당에서 말린다. 동네 사람들이 그걸 보고 웃는다. 그들 눈에는 소꿉장난이기 때문이다. 고추만큼 농약을 많이 주어야 하는 작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농사짓는 고추는 비료도 농약도 없다. 고추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 그렇다.

종자는 가능하면 어머니 집에서 가져온 것을 심는다. 강낭콩, 이른 콩, 서리태, 팥, 옥수수, 호박 등이 그렇다.

호박은 밭과 울타리 사이에 있는 공터에 심는다. 죽은 은행나무가 있어 밭으로 쓸 수 없는 땅이다. 내 호박 덩굴에는 길쭉한 호박이 열린다. 동네 사람들이 키우는 호박 덩굴에는 동그랗고 주름진 호박이 열리며, 그게 토종이라고 한다. 어느 것이 토종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어머니한테 받은 것이 좋다. 심을 때 거름을 잘 하면 한 아름이나 되는 큰 호박이 열리기도 한다. 그런 놈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들여 겨울에 호박죽을 끓여 먹는다.

그렇게 호박은 유용하지만 키울 때는 말썽쟁이다.

나는 호박 덩굴을 좁은 공간에 가두려고 노력하지만 호박은 아주 쉽게 탈출한다.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 넝쿨 장미를 덮어버리고 콩밭으로 몰래 덩굴을 뻗는다. 또 마당 쪽으로 다가와 주목을 타고 올라간다. 주목은 집 주인이 아끼는 나무지만 나는 덩굴을 다 제거하지 않았다. 주목 위에서 자태를 뽐내는 호박을 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호박꽃도 아름답다. ‘호박꽃도 꽃이라고!’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은 그 순간 적절치 않다. 꽃이 지고 호박이 주목에 매달려 성장하는 모습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호박은 이렇게 내게 외치는 듯하다.

‘네가 자성의 청정함을, 나의 청정함을 아느냐?’

최운초| 《눈을 부릅뜨고 와 귀를 가리고 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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