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에게는 어려서부터 아주 절친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왕궁에서 싯다르타 태자로 자라날 때에도 옆에서 늘 함께 지낸 사람입니다. 심지어 싯다르타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던 날,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며 배웅한 사람이고, 궁으로 돌아와 정반왕에게 태자의 출가를 보고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두 사람 인연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싯다르타 태자의 마부였던 찬나입니다. 신분은 낮았지만 그 누구보다 태자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왕궁에서 태자의 청소년 시절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니 어찌 보면 찬나의 인생 자체가 싯다르타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찬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자리했습니다.

▲ ⓒ강병호

‘우리 태자님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야! 나보다 더 태자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암, 그렇고말고.’

찬나는 석가족 사람들과 함께 출가하였는데 스님이 된 후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자리했습니다.

‘아, 나의 부처님! 지금 법문을 하시는 저 부처님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얼마나 오랫동안 저 분을 곁에서 모셨는데….’

찬나는 스님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흥, 당신들이 부처님을 존경한다고 말들 하지만, 부처님을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거야? 저 부처님은 오직 나만의 부처님이라고. 나는 당신들의 저 위대한 스승님을 아기왕자님 시절부터 모셔왔단 말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만큼 부처님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을 걸….’

부처님이 법문을 하려고 대중 앞에 자리하면 찬나의 가슴에는 자부심이 가득 찼습니다. 자신만이 기억하는 그 싯다르타 태자가 지금 저렇게 훌륭한 부처님이 되셨으니, 저 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면서 그 장한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커다란 흠모의 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부처님만 바라보고 사느라 정작 부처님이 들려주는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우리 부처님, 나의 부처님!’이라고만 생각하면 ‘부처님바라기’처럼 지냈지요.

출가를 한 까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열심히 그 말씀대로 수행하고 실천해서 자기 마음에 담긴 번뇌를 없애고 성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찬나는 스님이 되었으나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정성을 다해 섬기던 분이 이제는 진리의 스승이 되어 그 위상이 달라졌는데 찬나의 눈에는 그 달라진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 찬나에게 언제부터인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생겼습니다. 사리불과 목건련입니다. 이 두 사람은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사리불)이요, 신통제일(목건련)인 스님들로서, 부처님이 훌륭한 수행자라고 칭찬해 마지않는 분들이었지요. 사람들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처님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궁금한 점이 생기면 이 두 분 스님에게 몰려가서 자세한 내용을 여쭈었습니다.

찬나는 그게 못마땅했습니다. 마음에 불만이 쌓이더니 어느 사이 그는 이 두 스님의 흉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출가하여 스님이 됐으면서 정작 자기 수행은 전혀 하지 않고, 부처님과의 사적인 친분만을 앞세우고 거드름을 피우고, 스님들과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도 칭찬하고 모든 스님들이 찬탄하는 사리불과 목건련 존자를 걸핏하면 비방하기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스님들은 찬나가 도반들과 어울리지 않고 훌륭한 수행자를 비방하는 모습을 보면 부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찬나가 그나마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부처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찬나가 안타까워서 그를 불러서 타일렀습니다.

“사리불과 목견련 두 수행자는 모든 수행자의 모범이고 귀감이 되는 사람이다. 찬나여, 그대는 이렇게 훌륭한 수행자를 그대의 도반으로 삼아서 그들을 보고 배워야 한다. 나쁜 사람을 벗하지 말고 천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좋은 이를 벗 삼고, 고귀한 이를 늘 가까이 해야 한다.”(《법구경》 78번째 게송)

하지만 찬나의 귀에는 부처님의 이런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묵묵히 있다가 부처님 방을 나오면 다시 비방과 험담을 퍼부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후로도 찬나를 불러서 일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찬나의 마음에는 ‘진리’니 ‘수행’이니 ‘도반’이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나의 부처님’뿐이었습니다.

결국 찬나는 승단의 골칫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결정적으로 계율을 깨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승단에서 내보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부처님은 두 손을 들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찬나의 마음을 돌이키고 생각을 고쳐먹게 할 수는 없구나. 기다리자.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기회가 올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 사이 부처님은 80세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게 마련이며,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지요. 부처님의 육신도 허물어져서 이제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두 그루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펴게 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진작에 부처님께 여쭤볼 걸…’하며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내게 물어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그러자 스님들이 부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찬나 스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얼마나 골칫덩이였으면 부처님의 마지막 자리에서 그를 다루는 일을 여쭤보았을까요.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에게 ‘신의 회초리(브라흐마단다 梵檀)’라는 벌을 주어라.”

하늘의 신이 내려치는 회초리이니 천벌(天罰)이란 뜻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아주 무거운 형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처벌하는 것일까요? 물어도 대답하지 말고, 가르쳐주지도 말고,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반끼리 서로 의지하며 좋은 것을 일러주고 나쁜 것은 막아주고 말려야 하는데 찬나가 무슨 일을 해도 상대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마치고 이 사바세계를 완전히 떠나셨습니다. 찬나는 뒤늦게 숨을 거둔 부처님에게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그는 생각했지요.

‘틀림없이 부처님은 내게 특별한 유언을 남기셨을 거야. 부처님과 내가 얼마나 오래된 인연인데….’

그러나 찬나는 부처님이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찬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는 부처님이 영원히 살 줄 알았습니다. 왕궁에서의 친분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믿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나요? 자신의 신분도 왕궁의 마부에서 어엿한 수행자로 바뀌었는데, 그렇다면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찬나는 나의 왕자님, 나의 부처님만을 고집하며 지내느라 그 긴 세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간신히 의식이 돌아온 찬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신은 싯다르타 태자의 마부가 아니고, 부처님의 옛 친구도 아니고, 한 사람의 수행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친히 듣고 기억하고 수행하는 도반들이 아직 곁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르침을 전해받기로 결심합니다.

부처님과 가장 오랜 인연을 지녔으면서도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그 가르침을 전해 듣고 수행에 매진하게 된 찬나.

어쩌면 부처님은 신의 회초리라는 처벌을 내려서라도 그가 ‘누구의 무엇’이 아닌,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성자로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미령| 불교강사, 경전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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