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佛畵)라고 하면 불교 회화의 준말이며 쉽게 말해 불교 그림, 즉 불교의 사상과 교리에 기초하여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그려진 성스러운 종교화를 뜻한다. 삼국시대부터 중국이나 티베트 등을 통해 전해진 경전은 하나같이 한자나 범어로 쓰였으므로 극소수를 빼고는 거의 모든 백성이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경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기도 하고 극적인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다 보니 종교적인 측면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미적 아름다움이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일반 예술과는 달리 불교를 대상으로 하는 종교적인 그림으로만 보는 경향이 크다. 불화는 종교화로서도 그 중요성이 클 뿐만 아니라 예부터 전해오는 회화 작품을 통틀어 양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불화를 빼고는 우리 미술의 역사를 논할 수 없으며, 회화로서도 예술성이 대단히 높은 그림이기도 하다.

불화의 유래

불화가 언제부터 그려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라는 경전에 최초의 사원인 기원정사에 불화를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최초의 불화가 아닐까 한다. 아마도 불교의 성립과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 처음 그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현존하는 불화로는 BC 2세기경에 그려진 아잔타 석굴의 벽화를 가장 빠른 시기의 불화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불화는 삼국시대인 4세기경 중국을 통해 불교의 전파와 함께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의 불화는 현재 전해지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皇龍寺) 벽에 노송(老松)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사찰 건물의 벽에 불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불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두루마리 형식으로 그려진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당시의 불화를 어떻게 그렸을지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불화의 용도

일반적으로 예배용 불화, 장엄용 불화, 교화용 불화로 나눌 수 있다. 예배용 불화로는 후불탱화, 괘불, 신중탱화 등이 있고 장엄용 불화로는 불벽화, 포벽화, 건물의 천정이나 기둥에 그린 단청 등이 있으며 교화용 불화에는 변상도, 팔상도, 본생도, 감로도, 시왕도 등이 있다. 그러나 불화의 쓰임을 이렇게 구분 지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보니 서로 겸하여 쓰이고 있다. 여기서 탱화(幀畵)란 글자 그대로 벽에 거는 그림을 말하는데 초기에는 벽에 직접 그리던 벽화 방식을 취했으나 벽에 그리는 벽화는 제작하는 과정이 힘들고 불편하며, 다른 장소로 불화를 옮길 필요가 있을 때 이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니 점차 천이나 종이에 그려서 거는 방식으로 변하면서 탱화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불화의 시대별 특징

삼국시대의 불화는 아쉽게도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서 그 특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고분에 그려진 벽화나 전해오는 금동불상, 석불 등의 유물을 보면서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754~755년) 국보 제196호| 닥종이에 금은니(金銀泥)로 채색| 26×23㎝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통일신라시대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지만 불화로는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어 안타까움이 크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 종이에 붓으로 그린 그림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한 점만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을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변상도의 화면을 살펴보면 목조 건물을 배경으로 풍만하면서 균형 잡힌 몸매의 보살들을 자연스럽게 그렸으며 보살의 옷 주름도 유연한 선으로 세련되게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 화가들의 기량이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고귀하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귀족적이라는 점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려는 불교 국가답게 많은 사찰이 세워지고 불교 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기에 불화가 많이 조성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귀족들은 축복받는 세상이 계속되고 자자손손 영원한 번영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낌없이 큰돈을 들였기 때문에 최고의 기량을 갖춘 화가들이 한껏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때 그려진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보타락가산의 물가 바위에 앉은 관음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만나는 모습을 그린 불화로서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불화임에 부족함이 없다.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 중 선재동자가 53명의 스승을 찾아다니던 중에 28번째로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는 관음보살을 찾아가 깨달음을 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관음보살의 자비심은 맑은 물에 두루 비치는 달, 즉 수월(水月)과 같다 해서 수월관음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으며 고려 후기에 관음신앙이 성행하면서 많이 그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살펴보면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군의(裙衣)를 입고 속이 비치는 엷은 비단으로 몸을 감싼 관음보살이 자비로운 표정으로 반가부좌를 하고서 앉아 있으며, 그 아래 부분에 허리를 굽히고 합장하고 있는 선재동자, 버드나무가 꽂힌 정병, 보타락가산의 물가 동굴과 솟아난 두 그루의 대나무, 바다 속의 기화요초 등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수월관음도나 고려 불화의 공통점은 밝고 화려하고 찬란한 색채, 부드럽고 유려한 선, 균형 잡힌 화면 구성,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고려 불화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 공주 마곡사 괘불(1687년) 보물 제1260호| 능학(能學) 외| 삼베 바탕에 채색| 1,169×752.2㎝ | 충남 공주시 마곡사 소장

이에 반해 조선시대는 괘불(掛佛)과 감로도(甘露圖)에서 서민적이라는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불화가 훼손되고 사라지게 됨으로써 오히려 불교의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수많은 죽음과 전란에 지친 백성들이 불교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기에 새로이 많은 사찰들이 복원되고 중수되었고 새로운 양식의 불화가 조성되었다. 그 중 하나인 괘불은 큰 행사를 할 때 야외에 불단을 차리고 두 기둥에 거는 야외 행사용 대형 불화이다. 크기는 보통 10m가 넘으며, 14m 내외의 거대한 것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예술성이 뛰어난 최고의 회화를 뽑는다면 단연 조선시대의 괘불일 것이다. 괘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란에서 죽은 수많은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대규모 천도재를 지내면서 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석한 사람들이 법당 안에 다 들어 갈 수 없다 보니 법당 밖에 불단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높이 걸 불화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며 불화의 크기는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야외에 법단을 차려놓고 설법을 여는 행사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야단법석이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시끌벅적하다 보니 흔히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상태를 말할 때 ‘야단(惹端)났다’ 또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다’라고 하는데 그 어원이 ‘야단법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나라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혼란해진 조선 후기에 사람들에게 죄를 지으면 죽은 후 자신이 가게 될 지옥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탐욕과 타락을 경고하며 효와 선행을 베풀어야 극락왕생하게 된다는 의미가 담긴 감로도가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성행한 것으로 우리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서울 흥천사 감로도(1939년) 부분| 문성(文性) 외| 비단바탕에 채색| 147.8×208.1cm| 서울 성북구 흥천사 소장

감로도는 아귀(餓鬼)의 세계를 묘사한 그림으로 ‘우란분경변상도(盂蘭盆經變相圖)’라고도 한다.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백중인 음력 7월 15일 부처님과 스님께 음식을 공양하면 아귀도에 빠진 부모님을 구할 수 있다는 우란분재 의식이 성행하면서 많은 그림이 그려졌고 현재까지 상당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상, 중, 하의 삼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전개되는 구성, 즉 하단에서 중단으로, 중단에서 상단으로 펼쳐진다. 하단에는 육도 윤회상이 그려지고, 중단에는 육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를 올리는 장면이 묘사되었으며 정성을 다해 지어 올린 성반(盛飯)과 성스러운 꽃, 재를 올리는 사람들이 부처님 덕을 기리는 모습 등이 그려진다. 상단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나는 다보, 보승, 묘색신, 광박신, 이포외, 아미타, 감로왕 등의 칠여래(七如來)와 인로왕, 지장, 관음의 삼보살(三菩薩)이 등장한다.

감로도의 구성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부분은 하단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고통과 재난을 표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따르고 의지하도록 의도하고 있지만, 특이하게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흥미로운 그림도 있다.

바로 1939년에 그려진 서울 흥천사의 감로도이다. 20세기 초, 변화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근대 서양화 기법으로 그린 불화로서 기존의 감로도에서 필히 등장하는 아귀의 모습에다가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식민지 시대와 근대화 이전이 지속되는 현실을 나열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 법정에 많은 참관자가 모인 가운데 재판하는 모습, 전당포에서 돈을 빌리는 사람들,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전봇대 위에서 전기공사를 하는 모습, 근대식 건물이 늘어서고 전차가 다니는 거리의 모습, 당시 유행했던 서커스 공연을 보러 온 관객과 조련사의 채찍질에 따라 묘기를 부리는 코끼리, 터널로 들어가는 기차, 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동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총검을 들고 돌격하는 일본군 병사와 말 탄 지휘관, 탱크와 비행기, 군함이 동원된 전투 장면 등을 비롯해서 근대화 이전인 조선시대의 구습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모습 등을 서로 대비시켜 1930년대 우리의 모습을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서 붙인 것처럼 생생하다. 이처럼 다양한 인간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감로도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불화이자 풍속화이면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리얼리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화재로서의 불화

우리의 불화는 고구려로부터 조선까지 면면히, 왕실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사회,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며 이어져 온 예술이다. 특히 불교문화가 가장 찬란하던 고려시대의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를 보면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전통회화의 진수를 담고 있는 예술품으로서 당시의 회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시대와 달리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불화의 퇴조는 심화되었다. 유교를 국시로 하였더라도 많은 백성들에게 깊숙이 뿌리 박혀있는 불교를 꺾으려야 꺾을 수 없었고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불교를 믿고 지켜가면서 명맥을 유지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불화를 그리던 수준 높은 화원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고 불화의 제작은 위축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불교를 배척하는 국가정책은 사찰을 없애기도 하면서 불화를 비롯해서 불상, 불경 등도 흩어지게 됨에 따라 많은 수의 불화들이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닌가? 그 당시 일본은 불교가 성행하여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달라고 떼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우리의 불화도 함께 유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더 많은 수의 불화를 빼앗기기도 했고 불태워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에도 우리의 무지와 불찰, 무관심으로 수많은 불화들이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고려 불화든, 조선 불화든 소중한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지켜냈을 것이고 지금 우리에게 상당수는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와 옛 것보다 새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매우 크다보니 우리가 이어온 전통을 쉽게 버리고 외면하는 경향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불화는 종교적 목적을 위해 그려졌지만 내면에는 그 시대의 역사, 문화, 예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유산이며, 문화재로서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더욱 소중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 것, 우리의 전통을 소홀히 대하고 쉽게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박일선|단청산수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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