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무량사.

성주산(聖住山)은 오서산과 함께 보령시를 상징하는 명산으로, 시 동쪽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산이 ‘성인이 머무는 산’이란 뜻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 국사 무염(朗慧 國師 無染, 801~888) 스님과 통일신라 말 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같은 성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주산과 옥마산 사이를 관통하는 성주터널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왼쪽 계곡길로 1km 쯤 거슬러 오르면 탑과 석등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제법 드넓은 평지가 나옵니다. 무염 스님이 머물던 성주사(聖住寺)의 옛터지요.

법왕이 창건한 현충사찰 오합사

겨울을 재촉하는 듯 갑자기 찾아온 한기와 솜털 같은 눈송이를 곧 뿌릴 것 같은 하늘이 옛 절터를 스산하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본산으로 유명한 절터이지만, 이곳에 처음 자리한 사찰이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고 백제 법왕이 즉위 첫해(599)에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다는 기록〔<숭암산성주사사적기(崇巖山聖住寺寺蹟記)>〕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오합사는 지금으로 치면 사찰을 겸한 국립 현충시설이었겠지요.

삼국은 치열하게 정복전쟁을 벌였습니다. 법왕이 군사적 요충지였던 보령에 오합사를 지은 것은, 전쟁으로 지친 민중을 위로하고 호국영령을 천도해 국론을 모으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백제의 호국영령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일까요? 《삼국유사》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에 따르면 의자왕 19년(659), 이 절에 붉은 말〔赤馬〕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 절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담긴 문단이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를 서술한 부분인 점을 감안하면, 붉은 말이 출현한 것 또한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징조일 것입니다.

▲ 사적 제317호 ‘보령 성주사지’.

성주산문의 개산조 낭혜 국사 무염

오합사가 다시 역사의 장대한 강물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무염 스님이 이 절에 주석하면서 부터입니다.

성주산문의 개산조 무염 스님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입니다. 스님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지요.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에는 “아버지 김범청(金範淸)은 그 족보가 진골에서 1등급 떨어져 득난(得難, 6두품)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 글을 배울 때, 한 번 보면 바로 외워 ‘해동의 신동’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스님은 헌덕왕 5년(813)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 법성 (法性) 스님에게 출가했고, 부석사에서 석등(釋登, 혹은 釋澄) 스님에게 화엄을 배웠습니다.

스님은 헌덕왕 14년(822) 사신으로 가는 김양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스님은 “멀리 모든 물건에서 취하려 하니 어찌 부처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일갈하는 한 노인을 만난 후 깨친 바 있어 선사들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했습니다.

▲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불광사(佛光寺) 여만(如滿) 스님에게 “내가 많은 사람을 겪었으나 이와 같은 동국인을 본 적은 드물다. 뒷날 중국에 선법이 없어지면 동이에게 물어야 할 것”이라는 극찬을 받은 스님은 이어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 스님의 제자 마곡 보철(麻谷 寶徹, ?~?) 스님을 만나 법을 이었습니다. 마곡 스님은 “스승(마조)께서 나에게 예언하시기를 ‘만일 눈에 띄게 두드러진 동쪽 사람을 만나거든 그를 길거리로 보내라. 지혜의 강물이 사해에 넘치게 되리니, 그 공덕이 적지 않으리라.’ 하셨는데, 그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 말하고, “나는 지금 마조의 큰 아이〔大兒〕이지만 뒷날에는 해동의 대부(大父)가 될 것이니, 스승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며 법을 무염 스님에게 전했습니다.

스님은 마곡 스님이 입적하자 여러 고적과 선사를 찾아 중국 각지를 다니며 30여 년 동안 위독한 병자와 자식 없는 노인을 돌봤다고 합니다. ‘동방의 대보살’로 칭송받던 스님은 회창폐불(會昌廢佛, 당 무종이 일으킨 법난. 회창은 무종의 연호)이 일어나자 문성왕 7년(845) 귀국길에 오릅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스님은 김양의 청으로 오합사(烏合寺)에 머물며 선지(禪旨)을 널리 폈는데, 문성왕은 절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도록 했습니다.

흔히 구산선문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말 선종은 지방호족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지방호족이 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교학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으로 선종을 선택했다는 것이지요. 선승 상당수가 진골 출신의 몰락자나 육두품 이하 신분 출신자였던 점, 구산선문의 사원 경영이 지방호족세력의 사회·경제적 지원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점 등이 그 근거입니다.

▲ 부여 무량사.

그렇다고 해서 선종이 중앙정부를 멀리한 것은 아닙니다. 왕실 또한 선종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무염 스님이 문성, 경문 두 왕의 부름에 응했고, 경문·헌강 두 임금이 스님을 국사로 모신 것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상주 심묘사(心妙寺)로 주석처를 옮긴 스님이 진성왕 2년(888) 11월 입적하자 왕은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와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는 탑호를 내렸습니다.

무염 스님은 ‘말에 얽매이거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으며 곧장 심법(心法)에 바로 들어간다.’는 ‘무설토론(無說土論)’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제자로 순차, 원장, 영원, 현영 등 2000여 명을 두었습니다.

구산선문 중 가장 번창한 성주산문

무염 스님이 일으킨 성주산문은 구산선문 중 가장 크게 번성했습니다. 함양 영각사, 충주 정토사, 제천 월광사, 양평 보리사 등이 성주산문의 큰 절이었습니다. <숭암산성주사사적기>에 따르면 성주사는 한 때 쌀 씻은 물이 성수천을 따라 10리나 흘러내리고,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 7칸, 창고 50여 칸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다 합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건되지 못하고 그 터만 남았습니다. 1968년과 197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는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이때 중문, 탑, 금당 등을 남북 축으로 하여 남쪽에 중문, 탑, 금당 순으로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문에서 금당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돌린 1탑 1금당식 가람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적 제307호로 지정된 절터에는 오층석탑과 동·서·중앙 삼층석탑, 낭혜화상탑비, 석등, 석불 등이 남아있습니다. 이중 스님의 생애를 기록한 낭혜화상탑비의 비문(<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은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과 함께 최치원이 지은 4개의 비문, 즉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합니다. 이 사산비명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불교와 역사, 문화, 정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통효국사 범일 스님 창건 사찰, 무량사

성주사지에서 무량사로 길을 나섭니다. 직선거리로는 4.5km 남짓한 가까운 거리지만 만수산에 막혔으니, 성주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성주산로와 만수로를 따라 13km쯤 가야 합니다.

부여 무량사는 사굴산문을 개창한 통효 국사 범일(通曉 國師 梵日, 810∼889)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합니다. 무량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쳤지만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절 옆을 흐르는 만수천을 경계로 동쪽에 ‘무량사 구지(舊址)’로 불리는 옛 절터가 있는데, 2003년 발굴조사 결과 무량사 극락전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터가 확인됐고, ‘건덕(乾德) 9년’(971), ‘중희(重熙) 14년’(1045), ‘청녕병신(淸寧丙申)’〔청녕은 요나라 도종(재위 1055~1101)의 첫 연호. 재위 기간 중 병신년은 1056년이다.)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습니다. 이로서 무량사는 고려시대에 만수천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어 경영된 대찰이었음이 밝혀진 것이지요. 무량사는 이후 진묵 대사가 무량수불(아미타불)을 봉안하는 등 인조 때 중창됐다고 합니다.

▲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초상(ⓒ 문화재청)과 충남 유형문화재 제25호 ‘무량사 김시습 부도’.

매월당 설잠 스님이 생의 마지막 보내


무량사가 유명해진 것은 매월당 설잠(梅月堂 雪岑, 1435∼1493)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한 뒤의 일입니다. 설잠 스님은 생육신 중 한 분인 김시습(金時習)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다섯 살 때 이미 시를 지을 줄 안 설잠 스님은 세종이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며 선물을 내린 신동이었습니다. 스님이 ‘오세(五歲,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5살 때인 세종 31년(1449) 어머니를 여의자 스님은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스님은 불교와 인연을 맺고 송광사와 중흥사에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흘 밤낮을 통곡하던 스님은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유행(遊行) 중 설악산 오세암에서 출세간의 길에 들어선 것은 유교적 이상이 현실의 힘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스님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스님은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발문에서 자신이 전국을 유행한 이유를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 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스님에게 유행은 훼절된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절개를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무량사는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살아간 스님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입니다. 안 씨를 부인으로 맞아 잠시 환속했던 스님은 성종 13년(1482) 폐비 윤 씨가 사사되자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섰습니다.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半輪新月上林梢 山寺昏鐘第一鼓
淸影漸移風露下 一庭凉氣透窓凹

- 설잠 ‘가을밤에 초승달을 보며〔中秋夜新月〕’

돌보는 이 없는 산사 객방에 병든 몸을 뉘였을 스님은 마지막 유행길에 찾아든 무량사에서도 쓸쓸히 저녁을 맞았을 것입니다.

율곡 이이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4 <잡저(雜著)>에 실린 <김시습전(金時習傳)>에 따르면 “스님은 입적하기 전 ‘화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합니다. 대중이 유언에 따라 절 곁에 임시로 마련해 둔 빈소에 모셔두었다가 3년 후에 안장하려고 빈실(殯室)을 열어보니,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대중이 모두 놀라 “성불(成佛)하였다.”고 감탄하고, 다비하여 사리를 부도에 모셨다고 하지요.

▲ 무량사 경내에 새로 조성한 설잠 스님의 사리탑.

박물관 있던 사리 이운, 새 부도에 봉안

스님은 생전에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 자화상을 남겼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경내 영정각에는 보물 제1497로 지정된 스님의 영정 사본이 모셔져 있습니다. 진본은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지요. 스님의 영정은 반신상으로, 구슬로 장식한 끈이 달린 초립(草笠)을 쓰고 담홍색 포(袍)를 입은 모습입니다. 스님은 양미간을 찌푸린 표정인데,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이 배관기〔《운고시초(雲皐詩抄)》〕에서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攢眉滯愁容〕”이라고 묘사한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찌푸린 미간과 꼭 다문 입술, 우수에 찬 눈동자는 스님이 한평생 겪었을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설잠 스님의 사리탑은 무량사 매표소에 못 미쳐 있는 산내암자 무진암에 있습니다. 부도군 맨 앞줄 중앙에 있는 팔각원당형 사리탑이 스님의 것입니다. 중대석에 여의주를 문 용 두 마리를 새겼으며 옥개석 위에 둥근 공 모양의 복발을 얹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며 부도를 덮쳤는데, 이 때 사리가 1과 나왔다고 합니다. 이 사리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가 2017년 무량사로 이운되었고, 지난 10월 천왕문 앞 경내에 새로 조성한 사리탑에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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